변화보다 차라리 죽음을
썩기를 두려워하는 밀알처럼 인간의 에고는 추락하거나 바뀌거나 죽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무엇이 되기를 택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심지어 더 불편하고 더 왜곡된 것일지라도 ‘나 자신이 아닌 상태’만 아니라면 기꺼이 껍질을 바꿔 입기를 좋아합니다. 에고는 무너지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씁니다. 회개하기보다는 변명으로 옮겨가고, 침묵하기보다는 말의 형태를 바꾸며, 죽기보다는 영적으로 포장된 생존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도 에고는 십자가를 사랑하기보다 십자가를 설명하려 듭니다.
자기 부정은 너무 급진적이기에, 에고는 차라리 선한 역할을 선택하려고 포장을 시작합니다. 겸손해 보이는 얼굴, 영적인 언어, 헌신이라는 이름의 자기 보존.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자아의 중심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조용한 증거일 뿐입니다. 프란치스칸의 길이 그토록 불편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길은 에고에게 조금 나아지라고 말하지 않고, 조금 낮아지라고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내려오라”고 말합니다. “내려가서, 더 이상 네가 주인이 아닌 자리에 서라”고 말합니다.
에고에게 진짜 두려운 것은 고통도, 실패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서 하느님이 전부가 되시는 그 순간, 자아는 더 이상 자기 이름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고는 부서지기보다는 전환을 택하고, 죽기보다는 변형을 택합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주인 자리에서의 퇴장입니다. 내가 중심이기를 멈출 때, 관계가 살아나고, 은총이 숨을 쉬며, 하느님이 비로소 하느님이 되십니다.
에고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그러나 은총은 설득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우리가 더 이상 다른 무언가로 도망칠 수 없을 때, 마침내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이 결코 생명이 아니었음을, 버린 것이 사랑의 조건이었음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태어납니다. 에고가 아닌, 관계 안에서 숨 쉬는 참된 나로.
변화가 아닌 변형은 겉모습을 바꾸지만 관계를 살리지 못합니다. 변화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지만, 변형은 중심을 숨기는 기술입니다. 변화는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만, 변형은 여전히 내가 옳았음을 유지하려는 몸짓입니다. 그래서 변형은 관계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대화는 남아 있지만 만남은 사라지고, 언어는 더 세련되어지지만 마음은 더 이상 열리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요구되는 취약함과 책임을 피한 채, 나는 더 안전한 얼굴로 숨어듭니다.
관계는 ‘다른 모습의 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관계는 달라진 나, 즉 중심이 이동한 나를 요구합니다. 내가 주인이던 자리에서 내려와 너의 얼굴이 나의 기준이 되는 순간, 그때 비로소 변화는 관계의 언어가 됩니다. 그러나 변형은 단절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변형된 나는 여전히 나를 보호해야 하고, 보호해야 하는 자아는 결코 완전히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자유에서만 숨을 쉬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의 길이 관계적인 이유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포장하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덜 중심적인 존재로 옮겨 놓으라고 부릅니다. 변화는 관계를 낳고, 변형은 관계를 관리합니다. 변화는 상처를 통과하고, 변형은 상처를 회피합니다. 그래서 변형의 현실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관계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관계는 변형된 나와는 함께 살 수 없고, 변화된 나와만 함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같습니다. 내가 조금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이상 중심이 아니게 되는 것이 변화의 길입니다. 여기에 길에서 길을 만나 길이되어가는 존재의 신비로운 현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