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심이 만든 병 (2026,1,17. 복음묵상)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씀은 죄인을 향한 초대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의인이라 여기는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병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단순히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그분의 시선은 자기 자신을 이미 건강하다고 확신하는 마음, 곧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태도에 머뭅니다. 스스로 의인 노릇하는 자는 죄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죄는 이미 관리되고, 통제되고, 정당화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은총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비교와 평가를 시작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 “나는 규칙을 지킨다.” “나는 책임을 다했다.” 이 순간,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서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심판석에 앉힙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어디를 향하는가?
예수님의 분노는 방탕한 죄인들에게 향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날카로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자기 의로움으로 타인을 밀어내는 종교적 태도를 마주할 때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는 자는 죄인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죄인을 견뎌 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자기 의로움을 강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가장 깊이 거부하신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병은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의 진짜 의미
예수님의 이 선언은 도덕적 구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는 사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 자기 의로움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러 왔다.” 반대로 말하면, 자기 의로움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 그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완성된 사람을 찾으러 오지 않으셨고 성공한 신앙인을 부르러 오지 않으셨으며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을 모집하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필요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는 질문
이 말씀 앞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 스스로 의인 노릇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설명하는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비를 받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것은 죄가 아니라, 자비를 필요 없게 만드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의 신앙 태도를 향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는 의사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는 지난 날 내가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너무 오래 배워왔습니다. 규칙을 지킨 횟수로 마음을 재고, 흠 없는 말들로 상처를 가리고, 기도의 형식으로 내 안의 공허를 봉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의 눈은 언제나 다른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깨끗한 손이 아니라 떨리는 손을, 정답을 아는 입술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는 숨결을.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 말씀이 내 귀를 스칠 때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그 말씀은 위로가 아니라 나를 벗겨내는 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의인이라 믿는 순간, 나는 이미 치유를 거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며 형제를 멀리했고, 올바름을 붙잡느라 사랑을 놓쳤습니다. 프란치스코처럼 나는 알몸으로 서고 싶었습니다. 의로움의 겉옷을 벗고, 비교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주님, 저는 병자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완성된 이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흠집 난 그릇을 택하시고, 금 간 마음에 자비를 붓는 분. 그러니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는 하나, 나를 옳은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고 아픈 줄 아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소서. 형제를 판단하는 눈 대신 함께 앓는 눈을, 가르치려는 손 대신 붙잡아 주는 손을 주소서. 의사가 필요한 이로 당신 앞에 서는 것, 그것이 내가 다시 복음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기에 오늘도 나는 도구적 존재로 나의 자유를 온전히 내어드리기 위하여 나의 그릇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