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 집 안은 숨이 막힐 만큼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으려는 이들의 열망이 문을 막았고, 병든 몸을 실은 들것은 문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네 명의 친구는 지붕 위로 올라갔고, 흙과 기와를 걷어 내렸으며, 조심스레 한 사람의 삶을 하늘 아래로 내려보냈습니다. 그날, 예수께서는 병자의 다리를 먼저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관계의 무게를 보았습니다.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이를 끝까지 데려온 믿음, 말없이 땀으로 증명된 우정, 위험을 감수하며 열린 지붕처럼 열려 있던 마음을 보셨습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치유는 언제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굳어 있던 근육보다 먼저 굳어 있던 두려움이 풀리고, 마비보다 먼저 마비시켰던 수치와 고립이 풀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병자의 과거를 정죄하지 않았고, 그의 미래를 조건 없이 열어 주었습니다. 곁에 있던 이들은 속으로 묻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그러자 예수님은 보이는 표징을 내어 놓으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집으로 가거라.” 그는 일어섰고, 들것은 더 이상 짐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들것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람 하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기적의 힘이 아니라 함께 믿어 준 관계였음을 증언하는 표징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의 친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의 지붕을 기꺼이 뜯을 수 있는가? 믿음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서로의 무게를 나누어 들 때 얼굴을 드러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치유는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공동체의 응답임을, 구원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니라 함께 열어 가는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무상성과 보편적 사랑을 날라다주는 공동체의 관계적 내어줌이 온전한 몸으로 치유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자격을 증명하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먼저 주어지고, 이미 건네졌으며, 되돌려받지 않아도 스스로 충만한 사랑입니다. 이 무상성은 하늘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 사이를 건너와 얼굴을 얻습니다. 그 얼굴이 바로 공동체의 관계적 내어줌입니다. 사랑은 홀로 빛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늘 누군가의 손을 빌려 이동합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멈춘 이에게 누군가는 자신의 시간과 평판과 안위를 내려놓고 지붕을 향해 오릅니다. 그 오름은 성공을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타인의 생을 하늘 쪽으로 들어 올리는 겸손한 경사입니다. 하느님의 무상성은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하라”는 세상의 계산법을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공동체는 그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더 깊은 관계가 시작됨을 압니다. 내 몫을 줄이는 만큼 하느님의 사랑이 흐를 길이 넓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편적 사랑은 특정한 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내어줌은 가장 느린 이를 기준으로 속도를 낮추고, 가장 약한 이를 중심에 세웁니다. 이때 사랑은 추상이 아니라 사건이 됩니다. 말이 아니라 몸이 되고, 의도가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관계적 내어줌은 나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으로 나를 다시 놓는 일입니다.
내 이름이 사라지는 대신 형제자매의 이름이 선명해지고, 그 이름들 사이로 하느님의 무상한 사랑이 조용히 통과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사랑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운반합니다. 하늘에서 받은 것을 땅으로, 한 사람의 상처에서 다른 이의 희망으로, 조건 없는 은총을 조건 없는 손길로 오늘도 묵묵히 나릅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이미 충분했고, 우리는 그 충분함을 서로에게 내어주는 방식으로만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는 앎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