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금 관상 수녀원에 와 있기에 겸손과 관상의 관점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고 나누고자 하는데
오늘은 겸손한 자기 관상에 관해서 나누고
내일은 겸손한 하느님 관상에 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관상하면 보통 하느님 관상에 관해서만 얘기하는데
온전한 관상은 하느님도 관상하고 자신과 이웃도 하느님 안에서 관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온전한 관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겸손과 성령입니다.
아시다시피 겸손은 자기를 정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사람은 모름지기 국어와 산수를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어를 잘해서 자기 주제 파악을 잘해야 하고,
산수를 잘해서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해서 주제를 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고,
이에 비해 오늘 독서에서 얘기되는 적 그리스도들은 주제넘게 날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얼마나 자기 주제를 잘 알고 있느냐 하면
사람들과의 비교에서 자기를 주제 파악하는 정도가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주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정확히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신앙적인 겸손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낮추거나 높이지 않는 것을 뛰어넘어서,
하느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겸손에 관해 구구절절 너절하게 얘기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가 아닐뿐더러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오늘 독서에서 적 그리스도들은
하느님 앞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안에 머물지 않을뿐더러
자기가 그리스도인 양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착각함으로써 그리스도 밖에 있고,
자기를 그리스로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고 오도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를 신이라고 하며 날뛰는 자들이 있어
우매한 백성을 속이고 오도합니다.
오도(誤導)한다는 말은 말 그대로 길을 잘못 인도한다는 말인데
하느님께 가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하지 않고
자기에게 와 자기 밑에 있으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받는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겸손해야 할 뿐 아니라 우매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라고
오늘 서간이 세 번이나 얘기하듯 우리는 적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말고
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자로서 하느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