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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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내는 한나
신비적 의미로 풀면, 한나는 배필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녀의 나이도 교회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지내온 세월을 가리키지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여든넷이 됩니다. 여기서 일곱은 일곱 날로 표현되는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내고, 열둘은 사도들 가르침의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이라면, 보편 교회든 개별 신자든, 여든네 해 동안 꽉 차게 주님을 섬긴 이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일곱 해는 주님께서 육으로 사신 시간을 나타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간 전체를 일곱이라는 수로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주님 위엄의 특별한 속성 때문에, 일곱 해라는 단순한 숫자가 완전함의 표징으로서 그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를 가르치신 때를 나타냅니다. 또한, 한나를 주님의 은총으로 풀이하는 것도 교회의 신비로운 성사들을 확증해 줍니다.
한나는 ‘주님의 얼굴’로 불리는 프누엘의 딸이며 많은 자녀로 축복받은 아세르(신명 33,24 참조) 지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6
성령은 빠르게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를 신화시킨다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시편 46,4).
하느님은 사람 안에서 그러한 신적 변모를 어떻게 일으키는가? “변모시키는 자’인 성령을 통해서. 왜냐하면 “일체의 거룩은 성령에께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자신이 공간을 찾아내는 곳이면 어디로든 흘러들지 않을 수 없는 강물이다. 물이 빈 구멍을 채우듯이, 이 강물은 공간을 채운다. 구멍이 비어 있으면 비어 있을수록,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물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우리의 드넓은 공간과 접촉하면 접촉할수록, 성령이 우리를 더 충만히 채울 것이다. 영혼도 고무풍선처럼 “한없이 부풀어 오를 수 있다. 우리의 신성은 한계를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신성에 그어 놓는 한계선만이 있을 따름이다.
엑카르트는 성령을 지칭하기 위해 강물의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그가 셜교하는 성서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시편 46에서 이런 구절을 접한다.
강물의 줄기들이 하느님의 도성을
지존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
그 한가운데에 하느님이 계시므로 흔들림이 없으리라.
첫새벽에 주께서 도움을 주시리라.
한 소리 크게 외치시니 땅이 흔들리고
민족들은 뒤설레며, 나라들이 무너진다.
만군의 주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시편 46,4-7)(534)
<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15-22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제2부
예수 성심에 대한 묵상
제 11장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방해하는 장애들
두 번째 요점. 두 번째 장애 : 자기애(자기 중심적 사랑)
자기애는 나태함의 뿌리에 놓여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 냉담함과 부주의를 합리화할 구실을 제공한다. 또한 그것은 미묘하게 미덕처럼 보이는 겉모습으로 양심을 달래며, 우리가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믿게 만든다. 자기애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결점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대신 우리가 우연히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덕행이나 좋은 성품들을 영혼의 시야 속에 과장된 형태로 드러나게 만든다.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에는 외적 일의 부담이라는 핑계를 대고, 절제와 보속을 게을리하는 것에는 건강을 이유로 든다. 작은 잘못들은 스스로 관대하게 용서하며, 작은 덕행들은 하찮게 여기면서, 그 대신 그것을 ‘견고한 덕행’이라고 아첨하듯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또한 앞으로 이루게 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상상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면서, 정작 일상 속의 평범하고 작은 의무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렇듯 자기애는 자기기만 위에 살고 번성하며, 상상의 탁월함 속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요컨대,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 ― “너희는 모든 일에서 쓸모없는 종으로 여겨라” ― 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