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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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모든 신자들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 삶의 모범을 본받도록 교회가 정해 준 날입니다.
17세기 이후 성가정에 대한 공경과 신심 운동이 널리 퍼져 나가자, 교회는 1921년에 주님 공현 축일 후 첫 주일을 성가정 축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9년 전례 개혁 이후로는 성탄 대축일 후 첫 주일에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보내며, 모든 가정이 복음 정신 안에서 새로워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오늘은 특별히 ‘가정’의 참된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정은 수많은 길 가운데 가정은 첫째 가는 길이요, 가장 중요한 길입니다. 가정은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지나오는 삶의 길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또 새로운 가정을 이룸으로써 자기 인생의 구체적인 소명을 실현해 갑니다. 가정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사회 관계와 조직망이 근원을 두고 있는 기본 공동체입니다.
신앙과 영성의 핵심은 각자가 자기 가정 안에서 근본적으로 해야 할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가정생활을 소홀히 한 채 각종 신심 활동에만 열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신심 운동은 신자의 가정생활을 최우선적으로 돕고, 가정을 복음화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위에 보다 깊은 영성과, 보다 헌신적인 봉사와 사도직이 쌓여야 합니다.
가정은 하느님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신앙의 학교’입니다. 가정에서 어린이는 하느님을 알기 전에 먼저 부모를 압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는 좋든 나쁘든, 부모로부터 받은 개념적 지식과 정서적 경험을 통하여 부모를 알아가듯이,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하느님에 대한 첫 이미지가 바로 그 아이가 평생을 두고 하느님을 배워 가는 과정의 출발점이 됩니다.
가정은 인간의 보금자리이며, 안전한 안식처요, 친교를 누리는 장소입니다. 가정은 요람이며, 종교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신앙의 길이 시작되는 모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정은 신앙을 깨우치고 자라게 하는 가장 우선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지닌 공간입니다.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관계는 사랑의 경험이 처음으로 솟아나는 근원이 됩니다.
더 나아가 가정은 혈연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깊은 친교를 맺는 공동체 안에서도 ‘새로운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참된 인간적 성숙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앙 여정 동안 우리는 가정 안에서나, 직장에서나, 공동체 안에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도저히 참기 힘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내 안의 가장 나쁜 것을 끄집어내어 직면하게 만들고, 마음의 수련을 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스승’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한 가정의 참된 통치자가 될 때, 그 가정은 세상 한가운데 있는 작은 봉쇄 수도원과 같아집니다. 그리고 각자의 지위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다하는 가정 구성원 모두에게, 가정은 하루하루를 수련하는 장(場)이 됩니다. 만일 우리 각자가 가정과 직장과 사회 안에서 맡은 책무를 하느님 사랑 때문에 기쁘게 이행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정신적으로 ‘수도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가정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의 성화를 통하여 가정의 성화를 이루어 나가도록 기도합시다. 나 자신의 변화와 회개, 나 자신의 성화 없이는 어떤 가정도, 어떤 공동체도 참으로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성가정 예수, 마리아, 요셉께 우리 가정을 맡겨 드리며, 모든 가정이 평화와 사랑과 자비의 작은 성전이 되도록 함께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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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읽기> 묵시 15-22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성체성사는 어린양과 그분 교회의 혼인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신적 신랑을 가장 내밀한 결합 안에서 받아 모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영적 양식이자 잔치로써 우리 안에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음식처럼 우리가 그 음식을 우리 자신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점차 우리의 신랑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성체성사는 우리 신적 신랑과의 결합을 완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시련의 현세 상태에 완벽하게 알맞은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되는 결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외적 감각으로 파악할 수도 없고, 지성으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어떤 경험적 방법으로 증명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명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이다.
성체성사가 새 계약의 완성으로서 지니는 의미와, 부부가 한 몸으로 자신들을 결합시키는 혼인 계약의 행위 사이에는 풍부한 유비를 찾을 수 있다. 혼인의 행위가 결합적인 동시에 생명 창조적인 것처럼, 성체성사 또한 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신랑과 가장 내밀한 방식으로 결합시키며, 또한 우리에게 사랑의 은총을 주입하여 세상 안에서 영적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를 양육한다.(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