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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가리야의 노래 — 오늘을 비추는 평화의 길

by 이마르첼리노M posted Dec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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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가리야의 노래 오늘을 비추는 평화의 길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말은, 내 실존의 바닥을 딛고 하는 고백입니다. 그분은 높이 계시되 멀리 계시지 않고, 초월하시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그래서 그분의 첫 움직임은 언제나 방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힘이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능력이라면, 이 노래가 증언하는 힘은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자유, 다른 이를 살릴 수 있는 여백입니다.

 

하느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는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효력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덕스러울수록 하느님의 기억은 더 단단해집니다. 그 기억 안에서 우리는 원수의 손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원수란 언제나 밖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웅크린 공포,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강박, 타인을 경쟁자로 보는 시선, 이 모든 것에서 풀려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십니다.

 

평화는 도착지가 아니라 걷는 방식입니다. 앞서가며 끌어당기지 않고 뒤에서 밀어붙이지도 않으며 옆에서 속도를 맞추는 방식. 함께 걷는 동안 서로의 상처를 발로 밟지 않도록 걸음을 낮추는 지혜. 이 길에서 우리는 이기는 법이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즈가리야의 노래는 과거의 찬가가 아니라 오늘의 수련입니다. 찬미는 입술의 소리가 아니라 몸의 방향을 바꾸는 일. 하느님이 찾아오신다는 믿음으로 문을 잠그지 않는 하루이며 자비가 기억된다는 확신으로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선택입니다. 작은 빛을 신뢰하며 평화의 방식으로 걷는 느린 결단. 오늘도 새벽은 그렇게 열립니다. 찬미가 길이 되고, 자비가 빛이 되어, 우리의 발걸음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평화의 길로 이끕니다.

 

즈가리야의 노래는 시간 이전의 벌거숭이로 돌아가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입증하거나 보호할 무엇이 하나도 없는 공간을 갈망합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변명하지 않아도 되며, 잘 해내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하느님의 마음이 가슴 속에서 내가 나인 채로 머물 수 있는 곳,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넉넉한 공간을 우리는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이르게 옷을 입었습니다. 성과의 옷, 역할의 옷, 체면과 신앙의 옷, 심지어 잘 믿는 사람이라는 옷까지. 그 옷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듯 보였지만 동시에 하느님 앞에 설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늘 벌거숭이를 향해 오기 때문이입니다.

믿음이란 더 많은 것을 쌓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 이전의 벌거숭이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본래부터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우리를 다시 그 자리로 데려다 드리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고, 아무 공로도 내세우지 않은 채, “여기 있습니다하고 서는 일. 즈가리야의 노래는 바로 그 길을 가르쳐 줍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이 찬미는 하늘을 향해 던지는 구호가 아닙니다. 자신을 벗기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자의 자리에서 내려놓게 됩니다. 구원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시는 분에게서 온다는 고백이며 그 고백이 찬미입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신다는 말은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길 잃음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찾아오심 자체가 이미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속량은 값을 치르는 사건이 아니라 방향을 되돌리는 은총입니다. 즈가리야는 힘센 구원자를 노래합니다. 그러나 이 힘은 갑옷의 힘이 아니라 갑옷을 벗길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를 지키느라 굳어진 마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쌓아 올린 방어, 그 모든 것을 벗겨 두려움 없이 서게 하는 힘. 프란치스칸적 언어로 말하면 이 힘은 가난의 힘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지킬 필요가 없는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계약을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잊어버려도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느님께서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협력입니다. “두려움 없이 섬기도록.” 이 구절에서 믿음의 방향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겁에 질린 종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서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섬김은 의무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몸짓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아기에게 말을 건넵니다. 아기는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고 아무것도 지킬 수 없는 존재.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가장 가까운 존재. 예언자는 이 아기의 모습으로 길을 준비합니다. 정죄가 아니라 용서로, 명령이 아니라 초대로.

 

마침내 높은 곳에서 별이 찾아옵니다. 이 빛은 밤을 몰아내지 않습니다. 어둠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어둠 속에 오래 앉아 있던 이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줄 뿐입니다. “너는 아직 살아 있다.” “너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빛은 이 한마디만을 속삭입니다. 그 빛이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평화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벌거숭이로 걷는 방식입니다. 무장을 풀고, 비교를 멈추고,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내가 나인 채로 걷는 방식. 그래서 즈가리야의 노래는 우리에게 어떤 교리를 가르치기보다 하나의 되돌아감을 가르쳐 줍니다. 입증 이전으로, 시간 이전으로, 사랑 이전이 아닌 사랑만이 있었던 자리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압니다. 아무것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평화인지,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자유인지. 즈가리야의 노래는 오늘도 우리 가슴 속에서 낮게 울립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벗어도 괜찮다.” “그대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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