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태된 말씀이 태어나는 곳
말씀에 굴복한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하늘이 선택한 방식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자기 고집대로 세상을 밀어붙이던
굳은 중심을 내려놓고,
기꺼이 따름의 자리로 물러설 때
말씀은 비로소 머무를 자리를 찾는다.
하늘이 도우시는 이는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자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평화롭게 인정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위로부터 받지 않으면
숨조차 빌려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진실을 거스르는 힘,
그것이 자본주의의 심성이다.
사물은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관계는 나에게 유익해야 하며,
세상은 내가 관리하고
소비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믿게 만든다.
존재는 기능으로 축소되고
생명은 효율로 재단된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이 오만한 중심을 조용히 무너뜨린다.
만물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이 한 문장은 우리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세운다.
그분의 방식은 지배가 아니라 육화였다.
높은 곳에서 명령하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성탄의 신비는 전능이 자신을 줄인 사건이며,
말씀이 아기가 되어 우리의 손에 맡겨진 사건이다.
말씀은 강요하지 않았다.
몸을 취하고, 시간 안으로 들어오고,
관계 안에 자신을 노출시켰다.
거절될 수 있는 사랑,
상처 입을 수 있는 하느님,
그것이 육화의 겸손이다.
말씀에 굴복한다는 것은
이 성탄의 방식에
자신의 삶을 닮게 하는 일이다.
말씀을 소유하지 않고
잉태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
증명하지 않고 낳아 보내는 존재로 사는 것이다.
마리아처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자기 몸을 내어놓을 때,
말씀은 관념이 아니라 살이 되어 자란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태어난다.
용서로, 인내로, 기다림으로,
다시 손을 내미는 작은 선으로.
말씀은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관계 안에서,
위험을 감수한 사랑 안에서
선으로 태어난다.
말씀을 잉태한 이는
결국 세상을 바꾸지 않고
관계를 살린다.
말씀에 굴복한 삶은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다.
소유의 주인이 아니라
은총의 통로로 살기를 선택한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이 살아가실 때,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사이에서 선으로 태어날 때,
이것이 곧 성탄이 오늘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방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