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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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 18,13)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보살피도록 얼마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러니 ‘저자는 대장장이야. 신기료장수야. 농사꾼이야. 저 작자는 멍청이야’ 같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런 말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마음이 들 경우, 주님께서 얼마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온화한 사람이 될 것을 촉구하시고 이 작은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명령하시는지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그들 기운데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라’(마태 18,3 참조)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이
들 가운데 하나라도." ((10절) “죄짓게 하는."(마태 18,6) 자는 최악의 운명을 맞을 것입니다.
그분은 연자매를 예로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불행 선언과 함께 그런 사람을 우리의 손이나 눈인 것처럼 잘라버리라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당신의 뜻과 수난을 통해 이 작은 형제들을 소중히 여기심을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그들을 소중히 여길 것을 촉구하시며, 그들에게는 돌보아 주는 천사들이 있음을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는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께서 이런 형제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로마 14,15 참조), 아버지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길을 잃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목자는 구원받은 이들은 놔둔 채 길 잃은 이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길 잃은 양을 찾으면, 그것을 찾아서 또 그것이 안전해 크게 기뻐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 “모든 것”은 무엇인가? 엑카르트는 그것이 도덕적인 명령과 종교의 규율과 지침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종이 모르는 것을 벗이 알게 하기 위해 하느님은 무엇을 바라는가? 가장 충만한 계시는 우리의 신성을 일깨우는 일에 종사한다. 그것은 나를 똑같은 하느님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이유다. “하느님이 사람이 된 것은 여러분을 자신의 맏아들로 낳기 위해서다.” 엑카르트는 설교를 할 때마다 종종 이 주제로 되돌아간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자식이 되었다”라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하느님이 사람이 된 것이 참되다면,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 것 또한 참되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에게서 “듣고서”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적 존재와 신적 본성의 깊이다. 이 깊이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의 낳음과 탄생이 늘 일어난다. 아버지는 낳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하지않으며, 아들은 태어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출산의 진리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서 듣는 계시다. 이것
이야말로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들은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우리도 똑같은 독생자가 되게 하기 위해 알려 준 내용이다.(521)
<금주간 성서읽기> 2티모 1-4장 / 티토 1-3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제2부
예수 성심에 대한 묵상
제10장. 성심 신심에 필요한 자세에 대하여
네 번째 태도 : 내적 수련(내적 회심)
예수회 크루아제 신부는 이렇게 쓴다. “이 내적 수련 없이는 완덕을 향해 나아갈 수 없으며, 하느님과 더 친밀히 결합할 수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영의 평화와, 외적 일들에 얽매이지 않고 물러난 영혼 안에만 머무시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영성 저자는 묻는다.
“어찌하여 그렇게도 많은 신심 깊은 이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기도나 영성체, 영적 독서로부터 거의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수년 동안 모든 영적 수련을 해 왔음에도 그들의 열정은 여전히 그렇게 강하고, 그들의 결점은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가? 그 유일한 이유는 바로 내적 수련의 결핍 때문이다.”
크루아제는 말한다.
“산만한 영혼은 길 잃고 방황하는 양과 같아서 곧 늑대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이런 방황을 겪고 난 후 우리가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영혼은 마치 오랫동안 외국 땅에 머문 것처럼 영적인 것들에 대한 맛을 잃어버린다.”
또한 이 내적 수련이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내적으로 수련되고 영적인 사람은, 설사 다른 이들이 자기보다 더 큰 재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보통 사람 백 명보다 하느님을 위해 훨씬 더 실제적인 일을 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이냐시오, 빈첸시오 드 폴과 같은 성인들을 보라. 이들은 놀라울 정도의 내적 수련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을 위한 눈부신 외적 활동을 해냈다. 그들은 수천 가지의 근심과 산만함 속에서도, 늘 눈앞에 하느님을 두고 걸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성공의 이유였다. 그들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으며, 하느님의 힘과 능력이 그들 안에서 함께 일하시며 그들의 노고를 놀라운 결실로 완성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급박하거나 많아 보이는 외적 활동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내적 수련의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성인들이 증거하듯, 이 끊임없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오히려 우리가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마치 그분 눈앞에서 하듯, 하느님을 위해 행하는 일들로 더욱 증진된다. 그것들은 참된 하느님 사랑의 수많은 행위와 실천인 것이다. 성 이냐시오가 말했듯이, 사랑은 말보다 오히려 행동 안에 있기 때문이다.(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