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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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오르시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마태 15,29)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다
주님께서는 이제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사람들이 다리저는 이들을 산으로 데려옵니다. 사람들은 이제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그분의 발치에까지 옵니다! 이는 그들의 신앙을 이중으로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리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오직 그분의 발치에 놓이기만을 바랐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5 우리의 신성
이것을 위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고 하셨다(사도 1,4).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요한 15,15). 나의 벗은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5,15). 나는 너무나 박학한 나머지 영향력 있는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성직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쉽게 만족에 빠져 바보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우리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에 필요한 만큼만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나는 이런 식의 이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을까요? 나를 똑같은 하느님으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이 죽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다”고 하신 말씀을 그렇게 알아들어야 합니다.(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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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의식은 우주 자체에까지 손을 뻗는다. “나는 천상의 존재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똑같은 목적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싶다 ... 우주를 존재하게 하고, 우주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천상의 존재들이 부단히 움직이면서 추구하는 목적이다." 엑카르트는 별과 혹성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말한다.
“우리가 천상의 존재들에께서 배울 점은 많습니다. 그들은 흔들림이 없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품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와 같은 특성들이 사람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혼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이 우리를 쥐락퍼락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하고, 얼마나 창조적인가를 가르친다.
“천상의 존재들은 … 모든 것을 감싸고, 모든 것을 품어 안습니다. 사람도 이 모든 것을 사랑 속에서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 벗과 원수까지도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 벗은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받고, 원수는 하느님을 위해 사랑을 받습니다. 창조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과 관련하여 사랑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돕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그런 까닭에 천상의 존재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목수가 집을 지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합니다.”
중세의 전형적인 관심사가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호 관계였던 만큼, 액카르트는 우주적인 경향을 띠는 자연으로 시선을 돌린다. “자연은 선한 우주를 본받는다. 자연은 발생을 위해 모든 것의 생성과 소멸을 꾀한다. 자연의 일차적인 목적은 우주의 보존이다." 이처럼 엑카르트의 영적인 자각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것으로 보건데, 쉬르만이 다음과 같이 선언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엑카르트는 신학과 인간학과 우주론의 방법론적 구분을 폐지한다." 엑카르트의 시각은 단편적인 시각이 아니라 통전
적인 시각이다. 이런 이유로,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이 통전적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처렴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가득 부어준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정답게 대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을 정답게 대하라고 엑카르트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과거에 있었던 것 - 우리의 공통된 근원 - 과 지금 현존하는 것 - 우리의 공통된 존재 -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것도 우리에게 훤히 드러날 것이다. 엑카르트는 우주가 미래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司化)다. “창조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저마다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에 협력하기 위해 노력한다. " 만물과 하느님의 동화는 떼이야르 드 샤르탱의 시각과 유사하다. 그것은 우리가 “온통 하느님처럼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본디의 우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실로, 우리의 흘러 니옴은 안에 머무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