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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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9-50)
누가 나의 어머니냐?
동정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 것이 사실 아닙니까? 우리를 위하여 구원이 그리스도에 의해 나고 인간들 가운데에서 태어나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생겨나시기 전에 굳게 믿고, 믿음으로 잉태하고, 선택받았으니 말입니다.
거룩한 마리아는 확실하고 명백하게 아버지의 뜻을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어머니였던 사실보다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것이 마리아의 더 훌륭한 점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 더 훌륭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분을 낳기 전에 자기 태에 스승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거룩합니다. 마리아는 복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정 마리아보다 더 위대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교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지체며 특별한 지체고 탁월한 지체지만, 어쨌든 전체 몸의 지체일 뿐입니다. 마리아가 전체 몸의 한 부분일 뿐이라면, 실로 지체보다 몸이 더 위대합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전체이십나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거룩한 머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우리의 본보기인 그리스도의 또 다른 차원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이 됨과 동시에 하느님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준 본보기다. “인성과 신성이 그리스도라는 위격 안에서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되었다." 그는 ‘지혜의 입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지혜의 길을 걸어간 “행복” 그 자체다. 그는 예언자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알고 있었던 “순교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예언자다. 그는 우리에게 야훼의 법, 곧 정의와 자비의 법으로 되돌아갈 것을, 우리의 신적인 근원으로 되돌아가서 하느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것을 상기시킨 “위대한 예언자’였다. 우리도 이와 똑같이 해야 한다. 이와 똑같이 “상기시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언자라면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옥좌에서” 뛰어내린 “전능한 말씀”이다(지혜 18,15), 우리는 예수, 곧 왕다운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셜교 36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귀한 인성을 입은 고귀한 영혼으로서 우리의 본성을 칭찬하고 우리의 본성에 복을 주며 그것을 행복에로 끌어올린다.
그리스도의 영광이야말로 그리스도가 누린 자유의 정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버램과 그대로 둠의 정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선물들을 거리낌 없이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선물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까지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509)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10-13장 / 야고 1-5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하느님께 맡겨드림
그녀는 사무엘을 주님께 봉헌하고 감사의 찬양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의 기도가ㅏ 주님의 기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라는 대목에 속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결혼 생활 중에 있는 여인이 그 결혼 생활의 열매인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적은 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오직 아이를 낳기 위한 것에 정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과부 안나에 대해 기록된 것을 봅시다.
과부가 되어 여든 네 살이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루카 2,37).
제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대로 바오로 사도 역시 같은 토대 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외로운 과부는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밤이고 낮이고 끊임없이 간구하며 기도합니다(티모 5,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도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이 성가시게 자꾸만 요청하는 과부의 청을 결국은 들어주고 마는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과부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기도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과부를 모범으로 삼아 그렇게 기도하도록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2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