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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9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Nov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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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1월 19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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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미나/탈렌트’는 충실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선물이다
구원자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미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미나/탈렌트’를 받은 사람들과 그분의 나라를 송두리째 부정한 사람들의 차이는 실로 큽니다. 나라를 부정하는 자들은 왕권을 가진 분의 멍에를 벗어 던지는 반역자들이고, 탈렌트를 받은 이들은 그분을 섬겨 영광을 입습니다. 그리하여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습니다. 그들은 직무를 수행하며 이윤을 법니다. 성실히 일했다
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예수는 버림을 잘 알고 있었으며,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유로웠고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외적 가난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몸소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리고 이 가난은 마음의 가난, 세계를 보는 방식. 버림의 과정이 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유로웠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야말로 참된 버림의 본보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야말로 버릴 줄 알고 그대로 둘 줄 알았던 “순결한” 분이기 때문이다. 쉬르만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자유로웠고, 텅 비어 있었으며, 순결했다. 그는 아무런 집착도 없이 구원 사역을 이루었다. 예수야말로 근원적인 자유를 되찾은 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즉 버릴 줄 아는] 자의 이상이자 본바탕이다.
이 합일의 모범이자 목표인 예수는 우리가 말씀과 하나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이렇게 뜻매김한다: 순결한 예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모든 상과 모든 행위에 대한 소유욕을 여의고, 그를 본받아 버리고 - 초탈하고 - ‘처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이룬 모든 업적에 대한 권한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했다 (507)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10-13장 / 야고 1-5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토마스주의적 ·스콜라학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성사둘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표지로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신앙으로 받고 은총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효적으로” 은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중재한다. 신앙은 성사를 받는 데 필요하지만 은총을 중재하는 것은 성
사적 표지이다. 루터는 이 표지를 비워 버리고. 은총의 중재가 신앙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신앙은 새로운 양상을 얻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을 지성과 강하게 결부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계시 진리를 사실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실로 알고 인정하는 것은 또한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이, 후기 스콜라학에서는 너무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루터는 그것을 탑의 체험에서 자신을 위하여 새로 발견하고 거기서 “마음으로 믿으면 의화된다”(로마 10,10)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신앙이 신뢰의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단순히 모호해지고 후
퇴되어 있던 그 어떤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완전히 파악하였다. 그것을 절대시함으로써 그는 이 새로운 신뢰적인 신앙만을 구원 과정에서 통용시키고 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죽음에 대한 신뢰적인 신앙에서 당신에게로 가까이 오는 자에게 당신의 은총적 의를 선물하고, 당신 아들의 공덕을 그에게 인정한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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