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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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인 나병 환자 아홉은 감사한 마음을 잊어버리고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 주십니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아시리아에서 옮겨 온 타민족이었지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에서 그 일이 일어난 데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라는 구절은,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여기서 엑카르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 사이에 익히 알려진 현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따금 자신의 청중을 당혹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청중을 당황케 하는 예수의 능력이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뛰어나며 예수의 능력이 진리라고 넌지시 말한다. 그는 마리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복음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무엇이 우리가 듣고 따라야 할 말씀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다. 우리는 그리스도 … 참 하느님이자 참사람인 한 그리스도를 알아듣는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지키는 자가 알아듣는 말씀이다. 우리가 알아듣는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역사적인 그리스도이지만, 우리 안에서 태어난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났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우리 역시 남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하느님 말씀이다. 이 말씀 속에서 아버지는 나의 영, 여러분의 영, 그 말씀을 닮은 각 사람의 영에게 발설한다. 아버지가 이렇게 발설함으로써 여러분과 나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마치 말씀이 몸소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듯이. 아버지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면서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신성을 우리에게 온전히 준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신성, 곧 우리의 돌파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신화(神化)된다.(502)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3,7-19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이 탑의 체험이 일어난 것을 언제로 보고, 또 그에게 내용적으로 새로웠던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이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매우 이르게 잡으려는 경향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가능한 한 멀리 소급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렇다면 자비롭고 인자한 하느님의 발견 그 자체에서 과연 무엇이 전형적으로 종교개혁적이었는가를 묻게 되었는데, 그것은 루터가 그때까지 시달려 오던 자의적인 하느님의 유명론적인 관념을 스스로 극복한 데 불과하다. 그러나 새로 얻은 신상은 가톨릭적인 것으로서, 그것을 재발견하고 그리로 돌아온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합의 체험” 전체는 가톨릭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경향의 시기는 조기가 적합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때의 루터는 그의 사상과 감정에서 확실히 아직 가톨릭적이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역사가로서는 그리사르만이 탑의 체험을 그후 시기, 즉 1518/1519년으로 잡았다. 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루터의 소위 1545년의 “큰 자기 증언”에서, 루터가 두번째의 시편 강의를 하기 전에 이 인식이 그에게 왔다는 루터 자신의 진술에 두었다. 루터는 두번째 시편 강의를 1518∼ 1519년에 하였다. 최근에 와서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비처가 이러한 계산법에 동의함과 동시에, 루터가 실제로 이 무렵에 내적인 변화를 체험했다고 확인하였다. 이미 이보다 먼저 있은 히브리서 강의에서, 1517년 여름에 분명히 인식될 수 있는 것처럼, 가톨릭적 • 전통적인 성사와 교회 개념에 의심을 품게 되고, 신앙만으로의 의화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2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