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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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고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베드로 대성전이 건립되기 이전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거주하였던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습니다. 오늘 축일의 의미는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이런 배경위에 대성전 봉헌축일과 관련하여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주제는 성전입니다. 대성전 봉헌축일을 맞이하여 성전의 참된 의미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성전은 신이 인간들의 예배를 받고 신이 베푸는 혜택과 생명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들에게 내려온다고 생각되는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물론 평상시에 신이 머무는 장소가 인간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신전은 어떤 의미에서 천상적 거주지와 동일시되어 인간이 신들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상징 내용은 구약성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예루살렘의 성전은 하느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오늘 제2독서의 사도바오로의 코린토 1서에서 보듯이 신약성서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의 표징으로 변화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주님 보시기에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요, 기도의 집이며 당신 아버지의 집이기에 흥정의 장소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분개하셨고 예언자적인 행동으로 성전을 정화시키기 위하여 비둘기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을 허물면 사흘안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시며 당신 자신을 영적인 성전임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모퉁잇돌이요, 머리이며 기초이신 그리스도 위에 지은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의 몸에 딸린 지체로서 하느님의 성전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의 궁전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이 실제로 머무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 자체이므로 이 몸의 지체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몸과 함께 영적 성전이 되고 신앙과 사랑으로 영적인 성전을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피상적인 신앙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거행되는 예식은 무의미한 형식으로 타락할 경향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겉으로 화려하게 꾸민 성전에 관한 애착심이 마술적이며 맹목적인 미신으로 변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참된 주님의 영적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와 기도의 장소가 되어야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격려와 사랑이 가득찬 친교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성전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고 화려하게 꾸며진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고통이 담긴 사랑의 십자가가 없다면 그 성전은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웅장한 성전, 한시대를 휩쓰는 신학, 인기끄는 성경해석, 수백만명이 모인 성전일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뚜렷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전이 아니며 성령께서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지 외적인 성전에만 모시지 말고 우리의 영혼안에 모시고 살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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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3,7-19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 비유로써 같은 진리를 가르치셨다.
예를 들어, 그분께서는 제자들이 바리사이들처럼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이러한 비유들 중 가장 엄숙한 것은 임금의 아들의 혼인에 관한 것으로,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임금이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8–9)
분명히 이 혼인 잔치는 신적 신랑, 곧 메시아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와 맺으시는 혼인을 뜻한다. 이 거룩한 혼인의 성취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하신 목적이자 목표였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에게도 깊이 새겨졌다. 성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이 약속의 성취를 확장하는 사명으로 이해했는데, 교회 안에 사람들을 결합시킴으로써 그들을 하느님께 혼인시킨다고 여겼다. 그는 2코린토 11,2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 21,2에서 요한은 이렇게 본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