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간의 죄와 실수
자비와 선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의 은총 안에서 죄와 실수는 구원이라는 경험적 실제를 깨닫게 하는 정신적 물질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자신이 중심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도구적 존재로 자유를 내어 맡길 때 경험하는 구체적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실수는 자신의 중심을 무너뜨립니다.이로 인하여 자신이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무너진 곳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때가 그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헤치지 않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나라의 실현과 사회질서는 이상적인 꿈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대중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치충돌을 일으키는 세속적 가치와 복음적 가치 안에서 방황하거나 체념하면서 종교심만 부추깁니다. 숙제처럼 하는 기도, 많은 양의 희생과 제물을 바쳐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내어놓습니다. 눈앞의 이익과 눈앞의 즐거움, 그리고 눈앞의 편안함을 위해 그렇게 합니다. 죽고 나서 받을 상을 기대하거나 죽은 다음에 올 징벌을 피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합니다.
종교는 사회 질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합일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목적과 목표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틀에 복음적 가치를 끌어들여 지배적 구조를 만들고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인양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던 거친 본성으로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에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조직화된 종교는 자기네와 다른 무엇을 포용하거나 그에 대하여 안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유일한 세계는 온갖 복잡하고 다양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 분명한 사실에 우리가 너무나 무지하고 무력합니다.
구원은 완벽하게 죄가 없어야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얀세니즘에서 나온 이러한 사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선포한 복음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모든 인간에게 무상으로 주어지고 누구나에게 열려진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죄가 머리를 돌려 우리에게 유익한 무엇으로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부서진 마음을 한없는 자비로 돌보시는 아버지의 품에서 느끼는 깊은 해방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이 깊은 평화 속에서만 인간은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주는 이 선물은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로마 5,20)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죄로 인하여 부서진 마음에 희망을 줍니다. 이것이 변화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신성한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그길을 걷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생에 말년에 형제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여 우리는 이제 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합시다.” 다시 시작하려는 그 마음이 진정한 인간의 소중한 마음입니다. 죄로 인하여 한계를 경험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저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도 자력구원이라는 펠라기우스의 영향아래 놓여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로 사도는 말에서 떨어졌고, 베드로 사도는 배반에 떨어졌으면 성프란치스코는 나환자를 보는 역겨움에 떨어졌습니다. 나는 자만심에 떨어져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를 구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말씀에 굴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수치를 불러옵니다. 아버지는 두 팔을 벌리고 나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희망을 걸고 아버지께 달려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