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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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믿어서 복된 마리아
마리아께서 복되신 까닭은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리스도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한 여자에게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하셨습나다.
육신으로 그분의 형제나 친척이라고 해도,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 관계가 결국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마리아께서 몸보다 마음으로 더욱 기쁘게 그리스도를 품지 않으셨다면, 육신의 어머니라는 사실도 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이 안에 있음의 또 다른 보기는 성령 안에 있는 영이다. 이 안에 있음은 비움이 일어나는 만큼 일어난다. 엑카르트는 비움을 일컬어 또 다른 앓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부정의 길이 몰고 오는 무지의 길이자 신적인 무지의 길이다. 그것은 비움의 과정이다. 우리를 하느님의 적나라한 본질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 바로 비움의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순수한 본질이다. 우리의 무와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버리고 그대로 두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상을 투사하던 습관을 멈추게 된다.
우리가 그러한 자유와 접촉할 때. 하느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과 하나가 된다.
내가 그 지점에 이르러, 나 자신을 어떠한 상에도 투영하지 않고, 내 속에서 어떠한 상도 상상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던질 때, 비로소 나는 하느님의 적나라한 존재 - 본질 - 속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484)


<금주간 성서읽기> 1코린 3-8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종교다원론과 해석학적 이론들
농부는 접촉을 통해서 더 좋은 과일을 생산한다
존킵의 논지는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의 ‘자이의 해석학’을 내포하면서도, 내가 아직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진리를 타자로부터 배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해석학 이론 위에 선다. 배움은 어떻게 가능한가? 대화이건 독서이건 협력을 통한 연대이건, 인간이 다른 개인이나 공동체의 정신 내면에서 경험되고 표현된 것을 다시 경험하려면 언어성을 매개로 해야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성이란 구체적인 문자나 언어 행위만이 아니라 의미 전달의 매체로서 기능히는 상징과 의례까지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대화를 통한 창조적 배움을 달성하려면, 기독교인의 경우에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불교적 ‘삶의 길'과 ‘사유의 방식' , 불교라는 자기 초월 경험이 이뤄지는 공간으로 일단 ‘건너가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경험과 이해 후에 지기 종교의 전통 속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전에 없던 새로움으로 더 풍성해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타자의 경험과 삶의 방식에로 ‘건너가는’ 용기를 갖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자기의 자리에서만 타자를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물론 여기에서 ‘건너감 이란 반드시 불교 사찰에서 일정 기간 생활을 해야만 한다거나, 기독교 수도원 생활을 구체적으로 경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몸은 그곳에 가 있더라도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불교나 기독교 또는 다른 종교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들의 종교 체험과 사유를 해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해석학적 과정이며 해석학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