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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Oct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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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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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5일 연중 제 27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과 순종과 겸손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서에서 믿음은 모든 종교생활의 원천이며 중심입니다. 히브리어로 믿음이라는 말은 ‘단단함’과 ‘확실함’ 그리고 안전과 신뢰를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마음으로 어떻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안전한 피난처이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복음과 말씀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잠시 지나갈 일시적이고 불안전한 것에 마음을 두는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시는 참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며 주님께서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깨닫게 해줍니다. 믿음은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으며 성령에 의해 계시된 하느님 자신의 지혜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지각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순종은 강압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따르거나 수동적으로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아무런 미련없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뜻을 버리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믿을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은총의 선물로 드러내 보이셨고 우리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온 생애를 하느님께 대한 봉사로 바치게 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순종은 믿음의 표지이며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겸손은 오만의 반대인 겸허한 태도를 말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만심을 갖지 않고 자기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자각한 사람이 갖는 태도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과 성 프란치스코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자기는 가치없는 종에 불과하며 죄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 앞에 마음의 문을 열어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하느님께서는 이런 겸손한 사람을 드러높여 주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를 통해 우리 또한 겸손과 사랑과 순종의 덕을 드러내도록 초대합니다.
“거룩한 겸손은 교만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도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사랑은 악마의 온갖 유혹과 온갖 육적인 유혹과 온갖 육적인 두려움을 부끄럽게 합니다. 거룩한 순종은 온갖 육신적이며 육적인 원의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리고 순종은 육이 영에 순종하고 자기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육신을 제어합니다. 순종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과 야수들에게까지 복종케 하고 그들 수중에 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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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코린 3-8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 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2. 희생: 속죄의 보속 제물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완전한 정의 안에서 보속하기 위해 속죄의 희생 제물을 바치실 수 있도록 사람이 되셨다. 이는 죄의 중대성과 인간 스스로 합당한 보속을 바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모든 대죄는 하느님의 법을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법의 주인이신 하느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한 선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대죄는 무한한 악을 수반하며, 이는 우리에게 모든 영예와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한 무한하신 은인(恩人)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죄의 중대성은 그 죄로 모욕받는 존재의 존엄함에 비례한다.
반면에, 보속의 가치는 그 보속을 바치는 이의 존엄에 따라 결정된다. 유한하며, 죄로 인해 본성을 훼손당한 단순한 인간이 어찌 무한한 악에 대한 보속을 바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직접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어 우리 대신 보속을 바치시기로 결정하셨다. 바로 이 인간 본성 안에서 고통받고 죽기 위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살기 위해 태어났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나셨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구속(救贖)의 행위를, "인간의 모든 죄가 하느님께 가증스러운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더 뛰어난 것을 하느님께 바치신 것"이라 설명한다. 성육신하신 말씀의 생애 전체는, 특히 모든 이들을 향한 무한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수난의 봉헌은, 인간의 죄—곧 아담의 죄와 그 자손들의 모든 죄—가 하느님께 드린 불쾌보다 더 큰 기쁨을 하느님께 드린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생애의 그 최고 절정의 순간을 신비롭게 “지속시키기”를 바라셨고, 이를 교회의 성사적 현실 안에 매일, 모든 가톨릭 제대에서 현존하게 하셨다. 성체성사는 바로 우리의 구속을 위한 속죄 제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성사는 바로 그 동일한 희생 제사이며, 그리스도 자신이 도살된 희생 제물로서 현존하신다. 그분의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사역함으로써 제대 위에 당신의 피를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성사적으로 흘리시는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교회에 그의 영원한 제사로 주어졌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중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며 사용하신 말씀 안에서도 드러난다. 곧,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이것은 곧, 모든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시는 희생이, 역사 속 모든 죄가 하느님의 선하심을 거스른 것보다 더 큰 영광을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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