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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7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Sep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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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9월 17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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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루카 7,31-32)

이 세대 사람들인 유대인 지도자들
“불행하여라, 좋은 것을 나쁘다 하고 나쁜 것을 좋다 하는 자들! 어둠을 빛으로 만들고 빛을 어둠으로 만드는 자들! 쓴 것을 단 것으로 만들고 단 것을 쓴 것으로 만드는 지들!"(이사 5,20).
이 말은 예언자가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들,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두고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같은가?” 라고 하셨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엑카르트는 또 다른 기회에 우리의 신적인 자녀 됨을 설명한다. 우리의 신적인 자녀 됨은 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인용문에서 엑카르트는 아버지를 가리켜 “순수한 낳음”과 ‘만물의 생명”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행위는 “이들을 낳는” 행위이며, 이것이야말로 아버지가 하는 일의 전부라고 말한다. 이 신적인 자녀됨의 발생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 역시 자녀다.
바울로가 말한 대로, 우리는 “자녀이자 상속자이기도 하다." 엑카르트는 로마서의 충만한 맥락에 따라서 그러한 결론을 내린다. 로마서에서 우리는 이런 내용을 접한다.
1
하느님의 영에 인도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또 다시 불안에 떨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라 아들 됨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 영 안에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칩니다. 바로 이 영이 몸소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십니다. 자녀라면 또한 상속자이니,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입니다. 다만,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4-17).(471)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9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14-17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2절: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
에라스무스는 1469년경 성직자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데벤테르의 유명한 인문주의 학교에서 탁월한 교육을 받았고(1474∼1484), “공주생활 형제회”에서 “데보시오 모데르나”를 알게 되었다. 그는 1486년에 엠마우스의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에 들어가 1492년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감브리아 주교의 비서로서(1493∼1495), 파리의 학생으로서 (1495∼1499), 그는 열심히 인문주의를 연구하였다. 후에 그는 모국어보다 고전 라틴어를 더 잘 구사하게 되었다. 일련의 라틴어 실습 교본과 문법서들은 인문주의자로서의 그의 명성에 기초를 놓았고, 또한 라틴어를 학술어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영국에서(1499∼ 1500) 깊고 경건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를 알게 되었는데, 교회의 성인언 모어와 피셔, 특히 그와 친하였던 콜릿 등이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이들로부터 성서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습득하고,
1516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에 대한 첫 비판서를 간행하였는데, 이 책은 그를 일약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와 성서주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에 자세한 서론을 덧붙였는데, 여기서 그는 완전히 성서에 의하여 형성된 교회와 신학의 개혁사상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명시하였다.
그는 저서 「그리스도 군인의 편람」(1503) 및 「미련함의 찬미」(1509)에서 교회 및 생활에서의 폐해들을 신랄한 풍자로 비판하였다. 신약성서 입문에서는 산상설교에서 나온 그리스도교적 생활관의 하나인, 그의 “그리스도 철학”을 전개하였다. 복음의 순박하고 순수한 정신이 지배해야 하고, 교회 전통의 무익한 것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표어는 ‘폐해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체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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