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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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17일 연중 제 20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20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불은 평화가 아닌 분열이라는 갈라섬의 상징으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불의 상징을 통하여 우리 또한 세상에 성령의 불을 지피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불은 하느님의 백성이 사막에서 겪은 체험 속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동시에 두렵게 하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느님께서 타오르는 불의 모습으로 당신을 현시하시는 까닭은 당신이 지나가시는 통로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사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화된 자들을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불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사랑의 열정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성령과 불의 세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덕분에 세상을 태우는 불로 살아 왔습니다. 이 불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불타 올랐고(루가 24,32), 성령 강림날에는 모여 있던 제자들 위에 내리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불은 심판의 불이 아니고,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하느님 현시의 불입니다.
이렇게 하여 불은 성령의 상징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과의 간격이 없어집니다. 이 간격을 없애 주시는 분은 인간의 제일 깊은 곳에 존재하시는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세상에 성령의 불을 지핌은 사랑과 증오가 갈라서게 하고 겸손과 교만이 갈라서게 하고 정의와 불의가 갈라서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이 둘이 함께 공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분열이 되어 갈라서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참된 평화와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성령의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이 놓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불을 끄지 말아야 합니다.
성 보나벤뚜라의 다음의 말을 묵상하면서 눈으로 보아 알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에 늘 타올라서 하느님 사랑의 불을 세상에 지필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지도 말고 은총을 구하십시오. 즉 이해가 아니라 열망을, 연구가 아니라 기도의 탄식을, 스승이 아니라 신랑을,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명료함이 아니라 몽롱함을 구하고 빛이 아니라 강렬한 결합과 열렬한 사랑으로 온통 불타 하느님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불을 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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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읽기> 루카 5-7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1. 현존 (Presence)
우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낮아지심
성체성사는 육화로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겸손하심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그 사랑은 바로 그분께서 우리가 이 땅을 순례하는 동안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를 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어디에 사제와 감실이 있든지, 거기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위엄을 완전히 감추시고, 빵과 포도주의 모습 뒤에 자신을 숨기십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께 언제든지 다가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점을 그리스도의 실재 현존에 관한 글에서 매우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속한 것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은 우리의 본성 안에 참된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철학자가 말하듯이(『윤리학』 제9권), 친구 사이의 특징은 함께 거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24,28에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다’라 하시며, 당신의 육체적 현존을 우리에게 보상으로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순례의 여정 중에도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육체적 현존에서 완전히 떼어놓지 않으시고, 이 성사를 통해 당신의 몸과 피의 실체로 우리와 결합하십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6장 57절에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이 성사는 최고의 사랑의 표징이자,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친밀한 결합에서 비롯되는 희망의 고양(高揚)입니다.”(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