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택권이 당신에게 있다는 말씀이며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종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종은 주인을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그렇고 인간 세계에서는 그렇고 권력의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께서는 종인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권력 곧 힘에 따라 선택권이 있지 않고
사랑에 따라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선택권을 자기가 갖지만
사랑은 선택권을 너에게 줍니다.
권력은 선택권을 자기가 가지며 너를 종으로 만들고 관계를 주종관계로 만들지만
사랑은 선택권을 너에게 주며 너를 주인으로 만들고 관계를 연인관계로 만듭니다.
권력은 선택권을 자기가 갖고 너에게 의무를 주지만
사랑은 선택권을 너에게 주며 너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선택권과 자유를 주시며
우리의 선택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를 존엄한 사람 곧 자유를 가진 존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그럼으로써 존엄한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순종을 받고 싶으시지 복종을 받고 싶으시지 않습니다.
아무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시는데
오늘 여호수아기에서는 앞에서 한 얘기와 그 결이 약간 다릅니다.
우선 이 말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말이고,
하느님과 우상 사이에서 누굴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미루지 말고 오늘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요즘 얘기로 하면
선택 장애와 결정 장애가 있는 자식에게
이제 선택하고 결정하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할지 혼자 살지 선택과 결정을 하지 못하는 자식에게,
결혼할지 수도원에 갈지 선택과 결정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제는 선택과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왜 이런 촉구를 하는 것입니까?
행복이든 불행이든 무조건 양자택일하라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행복을 선택하라는 말이고,
행복을 위해 우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말이지요.
사실 우리는 이미 신앙인이고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느님을 선택한 줄 알았는데
하느님을 매일 새롭게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처럼 살고
결과적으로 세상을 선택한 셈이 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행복과 축복을 걷어찹니다.
이런 우리에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그리고 영원히 축복받은 아들들,
내 말을 듣고 여러분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2첼라노 191)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