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말씀나누기

2025년 8월 10일 연중 제 19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Aug 09, 202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No Attached Image

✝️ 2025년 8월 10일 연중 제 19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2025년 8월 10일 연중 제 19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음과 깨어있음과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 2독서 히브리에서는 히브리인들의 성서적 역사관과 그리스 사상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라는 표현은 약속과 성취라는 성서적 역사관을 반영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는 표현은 현상과 본질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해서 생겨난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돌아보며 집회서 저자처럼(집회 44-50장)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거룩한 독서로 돌아본 셈입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께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로마서나 갈라티아서에서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는 의화의 믿음이 아니라 약속된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꾸준히 그리고 변함없이 믿는 충실의 믿음입니다. 이 충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느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움과 걱정에 관한 가르침은 자연히 사람의 아들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그 도래가 지연될 수도 있으나(12,45) ‘그 시기는 예상할 수 없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일상의 시간이 종말의 시간이고 일상의 현실이 심판의 내용임을 알려줍니다. 한편 ‘주인이 와서 종들에게 식탁 시중을 든다’는 말씀은(12,37)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손수 보여 주실 행위이고(22,37) 제자들이 따라야 하는 모범입니다..
‘깨어있음’의 은유적 의미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하여 경계하는 것을 말하며 무기력과 태만을 물리치려는 노력을 뜻합니다. 신앙인들의 궁극적 목적은 주님의 날이 도래할 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밤중에 살면서도 어둠의 편에 있지 않기 위해 깨어 있고 경계해야 합니다.
깨어있음은 세상의 쾌락과 재물에 대해 초연함을 요구합니다. 마음에 방탕과 무절제한 생활과 주님을 기다림에 방해되는 모든 것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깨어 경계하는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인 큰 싸움을 앞당겨 보여주는 일상의 유혹들에 대항하는 투쟁 안에서 자신의 생활 전반에 걸려 단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경계해야 하며 믿음을 갖고 기도하며, 자기를 자제함으로써 세상 유혹의 함정을 피해야 합니다.
성 보나벤뚜라가 말하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묵상하며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한 주간 되기를 빕니다.
“창조된 사물들이 그러한 광휘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물들의 힘찬 목소리를 듣고도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귀머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분의 모든 작품을 찬미하지 않는 이는 누구나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표지를 보고도 제일원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는 누구나 바보임에 틀림없습니다.”
----------------------------------
✝️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8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유다 1장 / 루카 1-4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 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1. 현존 (Presence)
우리와 함께 머물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낮아지심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머물기 위하여, 인간이 인간 가운데 사는 방식으로, 곧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시대와 세계 속에서 감각적으로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하느님의 지극히 낮아지신 사랑(신적 겸손)은 이스라엘에 대한 계시를 통해 점진적으로 준비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 위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당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한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신명기 7,6 참조). 그리고 그리하여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에서, 그의 아버지 집안에서 불러내셨습니다(창세기 12,1).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후손들에게 점진적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그들과 혼인 계약을 맺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호세아 2,19–20). 또한 성전에 당신의 영광을 두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심으로써 그들 가운데 머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을 통한 하느님의 낮아지심은 유대인 작가 미하엘 비쇼그로드(Michael Wyschogrod)가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하느님(하셈, Hashem)께서 세상의 창조자, 아브라함의 선택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구원하신 분으로 알려지는 것을 당신의 존엄이 손상된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면, 인간이 하느님의 존엄을 그분이 원하시는 것 이상으로 지키려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무엇이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찬미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배워야 한다."
강생(Incarnation)은 이스라엘의 선택이라는 논리를 궁극까지 끌고 갑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자녀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그들과 특별한 계약으로 결합하시고 그들 가운데 머무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존엄을 낮추는 것”을 택하셨다면, 왜 그분께서 시온의 딸 가운데 선택된 이의 태중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의 인간 본성을 취하시는 더 큰 낮아지심을 선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실제로 성 바오로는 필리피서 2,4–8에서 강생을 하느님의 낮아지심의 전형으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만일 하느님의 낮아지심이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고유한 방식이라면, 하느님의 강생은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으로 “유다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이 자기 비움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루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의 무한한 자기를 낮춤을 드러냅니다.(40)
서비스 선택
<-클릭 로그인해주세요.
댓글
?
Powered by SocialXE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