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창세기는 마침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는 얘깁니다.
지난 화요일 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모세와 파라오를 각기 당신 도구로 쓰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욥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천상 회의를 여시고는
욥을 단련시키는 악역으로 사탄이라는 패를 쓰셨지요.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만 하느님의 도구라는 편견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에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이집트,
곧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는 데는 파라오 곧 사탄보다
더 역할을 잘하는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그 좋은 것을 다 놔두고 억울해서
어떻게 떠나고 어떻게 천당을 갈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떠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은 사람만
스스로 떠날 텐데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는 것조차
스스로 맛보고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맛이 얼마나 쓴지 하느님께서
맛보게 하셔야만 새로운 맛을 찾고 하느님 나라의 맛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서 이것을 우리는 잘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세상을 애착하는 사람을 세상에서 쓴맛 보게 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떠밀고 내모는 사람 곧 파라오와 사탄이 필요합니다.
어쨌거나 파라오의 악역 덕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그들을 건너가게 하는 것은 모세의 몫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까지 건너갈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 때문에 절망하고 건너가기(파스카)를
포기하려는 백성들을 수없이 달래며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영도하던 모세처럼
꺾이고 상처받은 우리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것은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며,
우리 인간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절망 치유의 힘입니다.
우리는 부러진 갈대를 꼴 보기 싫어합니다.
싱싱한 젊은이를 보고 싶지 쭈글쭈글한 늙은이를 보고 싶지 않고
싱싱한 것을 보고 싶지 상처받고 골골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치유할 수 없고 구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유하고 내가 구해 낼 수 있다면 덤벼들어 구할 텐데
그럴 수 없으니 그냥 외면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전능하시기에 자비로우시고,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싫어하실 리 없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없는 분으로 계시고 힘없는 분으로 돌아가셨지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에 우리보다 먼저 희망을 두시고 의탁하신 분이셨으며,
그렇기에 힘이 없는 우리에게 희망 되시고 우리도 희망을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힘없어도 힘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고 모두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에 힘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곁의 꺾인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들에게 희망이 되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