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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3일 연중 제 15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도미니코 posted Jul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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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7월 13일 연중 제 15주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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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3일 연중 제 15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통해 나를 중심으로 이웃을 규정짓지 말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이웃이 되어 주라는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은 유다교적 성격을 갖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 율법과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은 결국 ‘하느님의 사람 범주에 속하는 이는 누구인가’라는 논의로 나아가게 되며,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이’ 라고 답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에 대한 행복 선언에 이어 율법 교사를 시험하려고 예수께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 요한을 거부하였기에,예수를 시험하고 자기 정당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율법 교사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르코의 이중계명 논쟁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결합시킴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합니다. 이 비유가 던지는 충격은 무엇보다 주인공이 유다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인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일행을 거부한 사마리아인들과 대조적으로,어떤 사마리아인은 예수처럼 연민으로 가진 것을 내놓고 강도 만난 이를 도와줍니다. 아마도 제의 규정과 개인적 안전을 위하여 다른 길로 피해 간 사제와 레위인들은 성전 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이스라엘 백성에게 소외된 사마리인의 처지와 대조를 이룹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는 결론으로,주님께서는 이웃이 종교적,사회적,지리적 관계안에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연민과 나눔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제2독서는 콜로새 교회를 위협 하던 이설(異說)들에 대항하여 장엄한 그리스도 찬가를 제시합니다.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를 지니고 계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지 않고는 하느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으니 그리스도를 떠나서 지식의 다른 근원을 찾으려는 것은 헛되다고 알려줍니다. 이 찬미가는 창조 사건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우주적 위치와,창조물을 구원하는 그분의 역할을 소개하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론적 고백입니다. 찬가의 전반부(1,15-17)가 그리스도께서 창조 신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면, 찬가의 후반부(1,18-20)는 만물의 구원자로서 그리스도가 갖는 위치와 사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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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서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찬가를 우리의 일상안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그 자체로는 인식할 수 없고 눈에 보이는 소외받고 굶주린 이들을 위한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하고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만나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하는 이웃들에게 사랑의 나눔을 실천할 때 바로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찬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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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7월 2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로마 14-16장 / 갈라 1-3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 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희생적 사랑
혼인의 사랑에는 서로에게 완전하고 전적인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에페소서 5장 25~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그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분께서 교회를 말씀과 함께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시고, 티나 주름이나 그 밖에 흠잡을 데가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신부인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정화하기 위해 당신 생명을 쏟으셨던 그 희생 행위 자체를 교회에 선물로 주십니다.
이 무한한 사랑의 희생은 하느님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기쁘게 받으실 수 있는 제물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게 당신 자신의 살아 있는 현존만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영혼을 향한 최고의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셨던 그 행위 자체의 현존을 남기고자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끊임없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그 삶 전체가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그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드려진 결정적인 사랑의 표현이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희생의 행위를 성사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미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희생 제물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희생으로 다시금 바치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그분의 ‘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성체성사를 남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예수님의 자기 희생 행위 안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단순히 강생하신 로고스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기 내어줌이라는 역동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감정적 사랑으로 양식을 주시는 것을 넘어, 당신의 지극한 희생적 사랑을 우리의 사랑의 제물로 주심으로써 참사랑을 실천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할 수 있는, 상상조차 어려운 놀라운 은총을 받습니다. 이 희생은 죄의 용서를 위해, 그리고 모든 축복을 위해 드려지는 것입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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