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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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부활의 표시
불멸인 육체가 어떻게 못 자국을 보여 주며, 죽을 인간의 손이 그것을 만질 수 있었느냐는 질문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일어난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낮추시면서 행하신 일입니다. 문이 잠긴 곳으로 들어올 만큼 얇고 가벼운 것은 밀도가 전혀 없는 무엇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고,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같은 분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닌 채 되살아나신 것과 음식을 드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분께서 되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사도 10,41)라며 거듭 그 사실을 부활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처형 전 그분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 육체의 본성이 우리와 다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 이후 그분의 못 자국을 보고 그분이 여전히 죽을 운명의 육체를 지닌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이러한 신뢰는 하느님에게 적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믿는 신뢰가 우리 자신을 믿는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뢰는 사이비 종파의 태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 자신도 당연히 신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신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사람들이 영성 생활 속에서 기교나 요령을 동원해 황홀경에 이르려고 애쓰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과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엑카르트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자기중심적으로 기도와 단식, 밤샘, 그리고 모든 종교적 외적 고행에 매달리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모든 종류의 고행에 대한 아집은 여러분의 자유를 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이기적으로 시작한 고행을 그만두지 않는 한, 아집과 고행을 통해서는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아집에서 비롯된 고행을 완수하기 전에는 하느님도 신뢰하지 못하고, 여러분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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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프란치스코와 새 - 첫 번째 이야기
그가 새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의 새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의 창조주를 마냥 찬미하고 늘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닐 수 있게 하시려고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나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스스로는 도무지 걱정 않고도 살 수 있도록 그분은 여러분을 지켜 주시고 보살피십니다."
프란치스코도 말했고, 또 그와 함께 있었던 형제들도 증명했듯이, 새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의 본성대로 기이한 몸짓을 하면서 흥겨워하였다. 목을 놀이고, 날개를 빼며, 입을 벌려 그를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그의 수도복 옷자락으로 새들의 머리와 몸을 스치며 그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새들에게 십자성호를 그어 강복한 다음, 다른 곳으로 날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이어서 복되신 사부님은 기쁨에 넘쳐 자기의 동료들과 함께 갈 길을 떠났고, 모든 피조물들이 무릎을 꿇어 경배를 드리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리하여 천성이라기보다는 은총에 의하여 어느덧 단순해진 그는 새들이 그렇게 공손한 태도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보고서, 전에 새들에게 설교하지 않은 자신의 무관심에 스스로를 나무라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날부터 그는 모든 새들과 동물, 그리고 파충류에게까지, 비록 감각 없는 피조물에게까지도 그들의 창조주를 찬미하고 사랑할 것을 열의를 다하여 권하였다. 이것은 그가 구세주의 이름을 부르며 권하면 그들이 이에 순종하는 것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매일매일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설교하려고 알비아노라고 불리는 고을에 당도하여,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조용히 할 것을 청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침묵에 들어가 경건하게 서 있을 때, 한 떼의 제비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그곳에다 둥우리를 틀었다. 제비들이 재잘대는 바람에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하는 말이 사람들에게 들리지가 않자 그가 새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제비 자매들이여! 자매들은 이미 충분히 말을 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할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주님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침묵 가운데 조용하시오" 이리하여 그 새들은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의아스러워할 만큼 즉시 침묵에 들어갔고, 설교가 끝날때까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큰 감탄에 싸여 말하였다.
-첼라노가 전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중에서-
또 한번은 프란치스코가 다른 수사와 함께 베네지아 늪지를 걷고 있을 때 갈대 사이에서 지저귀고 있는 거대한 새떼를 만났다. 성인은 새들을 보았을 때 동료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자매인 새들은 그들의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 속에 들어가 성무일도를 드리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릅시다.“
그들이 거기 있는 새들 틈에 끼어들었는데 새들이 너무도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들은 자기들의 성무일도 바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성인은 그들에게 돌아서서 "자매들이여, 찬양받을 권리를 가지신 하느님께 우리가 찬양을 드릴 때까지 지저귀지 말아다오"라고 말하자 새들은 곧 조용해졌으며 동료들이 성무일도를 바칠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또 찬미를 다 바치고 난 후 프란치스코가 다시 그들에게 노래하길 허락할 때까지 그들은 그대로 있었다. 그 뒤 새들은 일상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가 시에나에서 병이 나 있었을 때 어떤 귀족이 산 채로 잡은 꿩 한 마리를 그에게 보내왔다. 그 새는 프란치스코를 보고 또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매우 다정하게 프란치스코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를 수차례 수도원 외곽에 있는 포도원 쪽으로 풀어 주었으나 그 새는 평생을 프란치스코와 살았기라도 한 듯이 항상 성인께로 되돌아왔다. 결국 그들은 성인을 자주 만나러 왔던 한 사람에게 주었지만 그 새는 프란치스코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싫은지 전혀 먹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그 새를 데려와 그 새가 프란치스코를 볼 수 있게 되자마자 그 새는 먹기 시작하고 온갖 기쁨의 표정을 다 지었다.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전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