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때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그곳에 남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아들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찾은 아들은
율법 교사들과 토론 중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행 가운데
아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예수님의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더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걱정한 것과 달리 아들 예수님은 태연했고
더 나아가 자신이 성전에 남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모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실 루카복음은 성모님의 모습을 전하면서
여러 번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행동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다른 여인들과 똑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아기를 갖게 되면서부터
마음속에 간직하는 방식을 선택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그 선택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임신이라는 죽을 위험을 무릅쓴 것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매 순간은
성모님께 고통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혼자 감당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대화가 있었기에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하느님과 함께 걷는 삶의 여정이기에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들을 마주할 때
하느님과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가 바로 해결되지는 않을수도 있지만
그 고통을 혼자 감당하면서
절망에 빠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