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죄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심이라는 말입니다.
더 풀어 얘기하면 이 성심의 사랑은 죄인의 죄에 의해 상처받았음에도
그 상처를 상처로 되돌리지 않고 용서로 되레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심은 상처 입는 것을 피하거나 마다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준 상처를 받아들이고 끌어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그의 악하고 독한 마음을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큰 사랑으로 마음이 넓어지면
악독한 마음에서 독을 뿜어낼 수밖에 없는 그의 고통과 불행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절대로 악독할 수 없고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악독한 사람은 자신이 먼저 수없이 상처받아 불행한 사람이고,
그에게서는 악과 독 밖에는 나올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 독이란 오랜 불행으로 악이 생겨나고 숙성된 결과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그의 악과 독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큰 사랑이 필요한데
우리 인간에게 그만한 사랑은 있을 수 없고 성심의 사랑만이 녹여낼 수 있지요.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성심의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고,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도 성심에서 그 사랑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성심을 닮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성심에 우리 마음이 물들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성심과 같아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닮고,
어떻게 물들고,
어떻게 같아질까요?
거듭 마음먹고,
자꾸 결심하는 겁니다.
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처를 피하지 않기로
거듭 마음먹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단련되고 자라게 하고
마침내 방독하지 않고 해독하는 겁니다.
이는 조개가 진주를 생성하기 위해 상처를 주는 이물질을 품는 것과 같고,
상처받으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진주층(Nacre)을 분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또한 민수기에서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매달아 달고 매일 쳐다보면서 이겨낸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사랑은 상처받으면서 성심의 사랑으로 자라고,
독을 끊임없이 해독하면서 독을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과 사랑이 성심의 사랑에 물들고 닮게 되어
우리가 독에 대해서 독해지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이 성심으로 물들고 닮도록
끊임없이 성심께 달려가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