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우선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말이기에
우리는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표현합니다.
대화는 적어도 둘 이상의 상대가 하는 것인데
기도 안에서는 그 두 상대를
하느님과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으로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는 것은
그것을 채워주실 마음도 갖고 계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채워주는 쪽으로 옮겨갑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모습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필요한 존재
우리에게는 무엇인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청해야 하고
하느님께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나오는 용서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가 남을 용서했을 때에만
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하기는 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기대하기는 어려워도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기 위해 남을 용서하려고 애를 쓰지만
번번이 성공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그것을 주실 마음도 있으십니다.
그렇게 보면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에는
조건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용서에 대한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건 없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데
우리가 남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갖거나
시도를 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자책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건 없이
즉 내가 남을 용서하는 것과 상관 없이
나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을 때
오히려 남을 용서하려는 시도가
조금은 더 수월하게 다가올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의 용서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