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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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사랑이 유일한 계명인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치 다른 계명은 없다는 듯이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분의 유일한 계명입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 같은 더 큰 계명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느님께서 실제로 사랑에 관한 이 계명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다른 계명들을 찾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까? 적어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가 다음 말로 칭찬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자애, 곧 사랑에 앞의 두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랑이 으뜸이라고 했지 유일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얼마나 많은 계명이,희망에 관한 얼마나 많은 계명이 주어진 것입니까! 그 모두를 다 모으거나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의 또 다른 말을 숙고해 봅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그러니 사랑이 있는 곳에 모자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랑이 없는 곳에, 유익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악마는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이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가 용서를 바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런 희망은 헛된 희망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는 절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떻게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이는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니 말입니다. 그런 자는 불경하고 간악합니다. 그리고 죄악을 사랑하는 이는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이 분명합니다(시편 11,5 참조).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이 계명을 철저히 지킵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아우구스티누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9
버림의 열매는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얘야, 일어나거라(루카 8,54).
엑카르트는 순결이라는 주제, 곧 우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여러 자리에서 전개한다. 그의 시대 이래로 대부분의 감상적인 영성들이 순결의 뜻을 성욕의 절제나 순진함으로 매겼던 반면, 엑카르트는 순결을 그런 식으로 뜻매김하지 않는다. 그가 이해한 순결은 형이상학적인 순결이나 본질 지향의 순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순결을 아이와 연관지어 말하는데. 이는 아이가 성적으로 때묻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보다 출처 내지는 근원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젊음, 곧 우리의 순결과 접촉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순결은 우리를 우리의 신적인 근원으로 데려갈 만큼 투명하다.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루카가 말하는 ‘아이’는 맑은 공기와 같은 것, 티 없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영혼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이와 같이 영혼이 순결하고 티가 없어야 한다." 순결이란 원죄나 이분법 혹은 분리 의식이 싹트기 전의 존재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의 원초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버림은 이 원초적인 자유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버리는 것이다. 쉬르만이 지적한 대로,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 혹은 참으로 버린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원초적인 자유를 되찾은” 사람이다.(393)


<금주간 성서읽기> 에페 1-6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만약 어떤 과부가 오직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마음을 온통 그곳에 두고 있다면 그 과부는 살아 있다 해도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성인들이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하면서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의 원천인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았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는 당신도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느님 앞에 당신이 가진 재물을 어떻게 관리했는가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고 해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만이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1코린 2,11).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무슨 일이나 미리 앞질러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하느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두 번 말씀하신 것, 나는 들었사옵니다…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라는 말씀을(시편 62,11-12).
당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들지 않도록 당신의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은 과부인 당신이 수행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당신을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들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시편 22,26),(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