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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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
덕을 실천하다
사랑과 열정 두 가지 다로 불리기에 합당한 것은 덕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실천이 지식과 함께할 때면 언제나 결코 작지 않은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심각한 불구가 됩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 2,26)라고 쓰여 있습니다 믿음은 본성에서도 하나이신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하느님에 대한 정직하고 진실한 고백을 모두 포함하지만, 실천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만 하고 그것을 당장 행하려는 미음이 없다면 조금도 유익하지 못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버리는 법과 그대로 두는 법을 익히고,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만물 안에 있는 길로 차츰 들어서기 시작한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법도 익히게 마련이다. 엑카르트는 설교 17에서 새로운 지식을 감수성과 수용성으로 뭇매김한 바 있다. 그는 본 설교에서 이 주제를 더 발전시킨다. 그는 우리의 수용성, 곧 우리의 수용성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고 말한다. 우리는 주는 능력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능력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임에는 한계가 없다. 모든 선물은 저마다 우리의 수용성을 길러 주어 새로운 선물과 더 나온 선물을 받게 한다. 하느님의 모든 선물은 우리의 수용성을 길러 주어 더 고귀하고 더 뛰어난 것을 갈망하게 한다. 은총의 자각은 피조물과 새로운 피조물을 사랑한 결과로 주어지는 열매다. 설교 8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야말로 궁극적인 기도다. 선물을 받아들이고, 늘 새로운 선물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능력이야말로 신적이다. 하느님의 행위가 전능하듯이, 영혼의 수용력도 깊고 아득하다. 영혼이 하느님으로 변모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를 변모시키는 것은 우리의 수용력이다. 우리는 버림과 그대로 둠에서 이러한 능력을 익힐 수 있다. 이 변모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가 변모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차츰 하느님의 지식으로 알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보라, 버림의 상급을!(388)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4-28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오직 홀로 살아가다
종교의 적들은 성모 공경의 새 운동을 공격하는 데, 연이어 일어난 이 불행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꼬마들을 진작 없애버렸으면 좋았을걸 ! 그랬더라면 그 녀석들을 이용하여 연극을 꾸민 자들의 가면이 벗겨졌을 텐데."
마누엘 베드로는 이런 참혹한 불행중에서도 꿋꿋이 참았고 슬픔에 산산 조각이 난 마음의 쓰라림을 욥처럼 초성한 몇 마디로 섭리에 의탁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 올린삐아는 열심한 신자이긴 해도 자식을 사랑한 나머지 자주 마음이 흔들리고 자칫하면 사랑하는 네 아이를 한꺼번에 앗아간 무서운 운명을 저주하려는 감정에 휩싸였다.
안토니오 도스 산토스의 사망 후 싱술꽃-궂은 사람들은 남편을 잃은 마리아 로사를 향하여 독설을 토했다.
“자식이나 에미 에비 할 것 없이 모두 꺼져 버려. 누군가가 남아 있는 한 사건은 끝나지 않아."
사람을 아찔하게 만드는 이 저주스런 말은 깊은 상처를 도려 내는 칼끝같이 마리아 로사의 슬픔에 잠긴 괴로운 마음을 쥐어뜯고 말았다. 드디어 마리아 로사는 자기 집을 괴롭히는 하늘의 불가사의한 권능은 이제 가장 사랑하는 딸 루치아마저 앗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루치아는 이제 켰다. 지금 13세다. 어머니와 아저씨의 고통을 생각할 때 루치아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고통 가운데에는 어떤 마음의 평화가 있었다. 그녀는 하느님이 섭리를 덮어 버린 것 같은 막 뒤에 감추인 손길, 자기와 자기 친척을 영원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성모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친절한 손길을 안정하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냉담 상태에 있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마리아의 도움으로 성사를 받고 평화중에 천상 아버지 품에 안기게 되었다.
루치아는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가장 친한 벗,하늘의 비밀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의 벗, 신비적 고행 생활의 상대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두 천구는 천국에서 천상 모후와 모든 성인들 속에서 편안하게 있겠으나 루치아는 ‘혼자’ 눈물의 골찌기인 이승에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이다.(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