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느님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자비와 선
삼위일체 하느님! 저는 당신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창조되지 않고 모양도 없는 존재의 신비로 존재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맨 처음으로 꼴을 갖추신 육화된 아버지의 영을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두 분 사이에 내어주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영을 성령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오감의 눈으로 보게 하신 하느님께서는
눈으로 보고, 들어보고, 맡아보고, 맛보고, 만져보는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 곁에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영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존재케 하시고, 살아 있게 하시며
우리를 도구로 삼아 관계의 혁명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육화의 겸손과 수난의 사랑이
내어주는 죽음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영으로 우리의 관계를 비추고 계십니다.
선의 흐름이 있는 곳에서 생명이 만발하고
존재하는 것에서 당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어
너와 자연 안에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서 황홀한 기쁨을 맛보듯이
둘이 함께 같은 대상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행복한 기쁨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선물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누는 사랑입니다.
창조된 피조물 안에서 감동과 감격을 넘어 감탄하는 신비로 하느님을 경험하는 이들은
영의 활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영의 활동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기쁨을 지닌 얼굴은 그 자체로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복음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부활의 신비는 죽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 신비입니다.
너를 위하여 나를 내어주는 기쁨이 있는 곳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함께하십니다.
치유가 이루어지는 현장에는 태도적 기쁨이 믿음 안에서 분출됩니다.
관계하는 방식을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자기만족으로 끝납니다.
내어주는 방식이 관계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선의 흐름이 있는 곳에 생명이 흐르고
생명이 있는 곳에 참여가 있으며
참여가 있는 곳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우리를 아버지께로 데려가십니다.
“내가 가서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그대들을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겠습니다.” (요한 14, 3)
삼위일체 하느님은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행동하는 자비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느님은 과거가 아니며 현재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개념보다 에너지로 일하시는 분으로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