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행전의 얘기는 여러모로 의미를 새기고,
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얘기입니다.
먼저 지나가되 지나치지 않는 점입니다.
이는 지나가면서 많이 지나치는 저와 다르지요.
저의 지나침에는 더 예쁘고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다가 보니
눈에 끌리지 않는 것들은 못 보는 비의도적 지나침도 있지만
보기 싫은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의도적인 지나침도 있지요.
가끔 아픈 사람을 보면 같이 마음이 아픈 것이 싫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하는데 도와주기 싫어서,
눈을 질끈 감고 서둘러 지나칩니다.
이런 저와 달리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지나치지 않고 유심히 봅니다.
그렇습니다.
유심히 보는 점, 이것이 제가 두 번째로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런데 ‘유심히’라는 말이 어떤 뜻입니까?
한자어의 유심(有心)에서 비롯된 말이지요.
어디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말로 ‘무심하게’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마음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구에게는 또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고,
자기가 좋아하고 그래서 갖고 싶은 것에는 관심이 있지요.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지요.
사람도 좋아하고 소유하고픈 사람에게는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유적인 관심도 있지만 사랑의 관심도 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런데 챨리 채플린은 정반대의 얘기를 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역시 사랑으로 보지 않고 소유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가까운 것일수록 좋은 것이고 선이기를 바라지요.
똥도 멀리 있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가시도 멀리 있으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똥이 가까이 있으면 냄새가 고약하고,
가시가 가까이 있으면 서로 찌르게 되겠지요.
그래서 사랑이 없을 땐 좋은 것이 가까이 있고
좋은 것들만 가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을 땐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엄마는 아기 똥도 싫지 않고 아기 똥을 보고 건강을 살핍니다.
사랑하는 의사는 병자의 병을 살피고 멀리 있는 병자까지 찾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가까이 있는 것을 지나치지 않음은 물론
멀리까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갑니다.
불구자나 병자를 보고 저는 제가 고쳐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며 사랑을 포기합니다.
고쳐줄 수 없어도 손을 얹어줄 순 있고 기도해줄 순 있는데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주님 사랑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돈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주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가 가진 것은 주님이고 주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을 오늘 재현합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 사랑 없다고 버틸 것인가?
그래서 나는 사랑할 수 없다고 버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