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벽같이 무덤으로 갑니다.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달레나가 생각했을 때
누군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꺼내 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그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립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것도 충격인데
스승님의 시신까지 없어졌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둘은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갑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먼저 아마포를 봅니다.
베드로는 더 나아가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봅니다.
특이한 점은
수건이 아마포와 함게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다는 점입니다.
만약 누군가 시신을 꺼내 갔다면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를
굳이 벗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시간이 아직 어두울 때
그렇게 보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꺼내 갔다면 그 전에 그랬을 것이고
아마도 그 일은 급하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 긴급한 상황에서
수건을 개어 놓고 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시신을 꺼내 간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비어 있는 무덤
흩어져 있는 아마포
그리고 따로 개켜겨 있는 수건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을 보고 믿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요한이 본 것을 우리도 따라서 보고 있지만
요한은 무엇을 보고 믿은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에서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너울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났던 모세는
하느님의 영광 때문에
얼굴에서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모세는 너울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을 언급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의 영광을
가릴 필요가 없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수건이 벗겨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이며
그것을 요한은 보았습니다.
즉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사건으로
요한은 믿었습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기에
부활 사건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전지전능하심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도
당신의 영광에 함께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한계를 지닌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천년 전의 부활 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희망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