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삼백 데라리온 어치의 향유를 발에 바르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는 항의와 비판을
받으시는데 제 생각에 이 비판은 날카롭고 정의롭기도 하여 참 뼈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신 것은,
유다의 비판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도 같은 생각이셨을 겁니다.
그 비싼 향유를 당신 발에 바르는 것보다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원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 행위를 마리아에게 허용하신 것도
당신이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 허용하신 것일 겁니다.
사랑의 허용,
사랑의 수용,
사랑을 귀히 여김.
이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적당한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예전의 저는 누가 무엇을 제게 선물하실 때 칼 같이 거절했습니다.
저의 가난을 위해서입니다.
견물생심처럼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작은 구멍이 봇물 터지듯 하게 할 것이기에
겁먹고 미리 그리고 아예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주시는 분들의 사랑을 고려하고 배려할 사랑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때 저의 가난은 많이 타락했지만
사랑의 여유는 많이 생겼습니다.
그 선물을 사랑으로 받아 나의 소유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
사랑이 순환하게 하는 것 곧 돌고 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허용과 사랑의 수용과 사랑을 귀히 여김이
사랑의 순환이 되게 함이 저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발 씻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실 겁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선언하실 것이고,
주님의 발을 씻어드린 마리아도 주님 돌아가신 뒤에는
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의 발을 주님 발 씻어드렸듯 씻어줬을 겁니다.
이럴 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도 대립이 되지 않고 순환이 되는데
이 사랑의 순환을 오늘 주님과 마리아의 사랑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