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브라함을 모두 얘기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얘기이고,
복음은 그 아브라함이 보리라고 희망하며 즐거워했던
그분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서와 복음에는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도 나옵니다.
“나를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날을 보리라 즐거워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의 “나를 보아라.”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봤더니
먼 훗날 당신의 오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추켜세우시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묵상했는데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보면 땅만 보지 않고 하늘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자기만 보지 않고 꽃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우리나라만 보지 않고 다른 나라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그리스도교만 보지 않고 타 종교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보지 않고 저기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지금만 보지 않고 미래도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만 보지 않고 희망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죽음만 보지 않고 부활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하느님 말씀대로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기에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장소적 경계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도 넘을 수 있었고 미래 메시아 시대도 내다볼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런 경지를 얘기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마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