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가 설왕설래하는 얘기입니다.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메시아 또는 예언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은 왜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고
수석 사재들과 바리사이들이 질책하자 예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니코데모가 본인의 말을 듣고 한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라는 율법을 들어
신중론을 펴자 무지막지한 말로 그 말을 막아버립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을 보면서 저는 ‘결정과 단정’을 오늘 강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결정(決定)과 단정(斷定)
지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단정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단정이란 끊을 단(斷), 정할 정(定)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죄다 끊어버리고 혼자서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많이 노력하는 시노달리따스와 정반대지요.
시노달리따스는 함께 여정을 간다는 뜻의 Synod에서 나온 말로
함께 결정하는 방식과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결정할 때 제일 쉬운 방식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그저 따르는 방식입니다.
제일 쉬운 방식이지만 이것은 제일 나쁜 방식이지요.
민주주의적으로도 나쁜 방식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나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겐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쉬운 방식이 다수결 의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독단적인 결정 방식보다 한결 민주적이긴 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니고 제일 완전한 방식도 아닙니다.
제일 좋고 완전한 방식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밑에서부터 공동으로 합의를 이루어낼 때까지 서로 설득하고
계속 논의하는 방식이니 제일 완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근자에 시노달리따스를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부터 십수 차례 공의회까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 집단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우리 역사에서 이러하지 못한 적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 단체들 가운데서 이러하지 못한 곳도 많지요.
이런 면에서 제가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저희 프란치스칸 공동체들 가운데도 이런 곳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따스 정신을 제일 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인데 말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Fraternitas 곧 형제적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 책임자가 있지만 그는 장상이 아니라 봉사자요 수호자이고,
모든 형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모든 형제와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단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결정은 하되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에게서 배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