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불행한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다>
너무 쉽게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불행한 사람에게만 원수가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행복한 사람만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원수란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욕을 했어도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하지 않으면 그는 원수가 아닙니다.
상처를 줬어도 내가 상처를 받지 않으면 그는 내게 원수가 아닙니다.
누가 욕을 해도 내가 불행하지 않고,
누가 상처를 줘도 내가 상처 받지 않는 것은 방어능력입니까?
어떠한 고통도 완전하게 차단하는 무통증과 같은 것입니까?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고통을 완전하게 차단하는 무통증은 완벽한 행복수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통증은 행복수단이 아니라 행복불감증입니다.
그러므로 욕을 해도 내가 행복한 것은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는 하느님으로 인해 진정 행복한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행복한 사람은 연기에 그을음 타지 않는 것처럼
원수들의 그 어떤 행복방해 책동에도 불행의 그을음을 타지 않습니다.
원수들의 그 어떤 행복방해 책동에도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원수를 가여워하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 사랑에까지 오르게 한 원수가 고마워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이 말씀을 받아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원수 사랑에 과감히 도전하라는 도전을 받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우리 오늘 원수 사랑에 과감히 도전하기로 결심합니다.
사랑하기위해 예수님께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