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와서 보시오.”
나타나엘의 말대로 나자렛에서는 나올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예루사람에서도 나올 좋은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자렛에서도 나올 좋은 것이 있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머드팩하기에 좋은 진흙이 나올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메시아는 거기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메시아는 하늘에서만 오시는 것인데
하늘로부터 찾아오신 것을 성탄이요 육화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타나엘의 말이 맞긴 맞습니다.
그래서 나타나엘이 거짓이 없는 사람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나자렛 사람인 것도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메시아가 근본적으로는 하늘에서 오셨지만
경과적으로는 나자렛에서 온 것입니다.
메시아는 본래 그런 분이십니다.
하늘에 딱 버티고 앉아 계실 분,
하늘을 지키고 계실 분이 아니라 이 땅을 찾아오실 분이시고,
이 땅에 오셔서도 나자렛 한 곳에 죽치고 앉아 계시지 않고
예루살렘이나 이곳 우리게까지 찾아오시기에 경과적이십니다.
경과적이라고 할 때 經자도 過자도 다 지나감의 뜻이 있기에
메시아는 우리를 찾아오시기도 하지만 지나가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주님을 자기 고장에 붙잡아두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시며 떠나시잖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찾아오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찾아가야 하고 만나 뵈어야 하지요.
이번 주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의 연속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에게 메시아를 가리키며 찾아뵙게 했고,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가리키며 찾아뵙게 했고,
필립보에게 메시아가 나타나셔서 제자로 삼으시자
필립보는 오늘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가리키며 찾아뵙게 합니다.
이때 중요한 행위가 두 가지입니다.
곧 ‘찾아가는 것’과 ‘뵙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것은 열성 또는 열망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땅까지 오신 거리를 생각할 때
베틀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동방박사들이 찾아뵙는 것이나
자기 동네에 찾아오신 주님을 중풍 병자와 동료들이 지붕을 뚫고서라도
찾아뵙는 것처럼 우리도 그 정도의 열성과 열망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으로 뵙는 것인데
뵙는 것은 갈망입니다.
사실 뵙고 싶은 갈망 때문에 찾아가는 열성도 우리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원천리는 보고 싶은 것에 비하며 천 리도 멀지 않고,
보고 싶은 갈망 때문에 천 리도 멀지 않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의 사랑은 두 가지입니다.
갈망과 열성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어떠한 갈망도 없고 열성도 없다면
아무런 사랑도 없다는 뜻이고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나요?
갈망과 열성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