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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탄( Nativita 14세기) : 자옷도 학파 (Giotto 학파)

by 이종한요한 posted Jan 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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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성탄( Nativita 14세기)

작가 : 자옷도 학파 (Giotto 학파)

크기 : 프레스코

소재지: 아씨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어느 종교이던 창시자의 탄일은 그들의 영성이나 정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슬람에서 모하멧의 탄생 설화나 불교 석가모니의 탄생 설화는 참으로 불교적 성격 이해에 도움이 되고 있다.

 

부처님은 조그만 왕국의 왕자 신분으로 태어나시면서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태어나시고 태어나시자마자 동서남북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維我獨尊)이라고 하셨다는데 이것은 불교 교리 이해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부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중생을 구하시기 위한 존재로서 중생을 구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달은 존재이므로 중생과 다른 차원의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예수님의 탄생은 이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어려움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구하시기 위해 어떤 지혜나 신통력을 가지고 오시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열악한 현실에 동참하시기 위해 인간이 지닌 모든 약점을 다 지니고 태어나신 분임을 알리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강생, 육화(肉化)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인간의 처지는 마찬가지이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취하신 방법은 불교와 전혀 다르게 인간의 모든 약점에 동참하시는 존재로서의 예수님의 탄생을 그리고 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악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짖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히브리 4: 15- 16)

 

이런 예수 탄생의 특징은 신학자들이 만든 교리로서는 정확한 표현으로 정착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요 참 사람이라는 이라는 이 교리는 약품의 성분 함량처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초세기에는 예수님의 인간성 보다 신성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 시작된 종교가 힘없고 약한 창시자를 두었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었기에 당시 다른 종교나 신화에서 인기 있던 힘있는 존재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강조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면서 예수님의 인성이란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존재성도 하느님으로서의 막강한 존재로 부각되던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더욱이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이었기에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당시 겪어야 했던 박해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으나 성탄에 대한 것은 성서에서도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다른 복음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는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 중요치 않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 자유를 얻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탄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하느님의 아들 예수로서의 권능이나 위엄에 대한 강조가 기본이었으며 인간의 허악함을 타고난 존재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선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시대상의 차원에서는 이해 가능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인성 특히 허약한 인성에 대한 강조는 12세기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같은 탁발 수도회가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묘사에 있어서도 십자가에 비참하게 달리는 예수님과 같은 형상 보다는 부활하신 왕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강조가 더 일반적이었다.

 

우리와 같은 허약한 인성을 타고난 예수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성탄 이야기의 내용처럼 적합한 것도 없었기에 많은 화가들이 성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고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되는 크리스챤 신앙의 핵심에서 예수님의 진면모를 표현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주제였다.

 

또한 이 작품은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 다음 내용을 주제로 그려진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 하였다. 그러자 천사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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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구유로 보이기에도 너무 허술하게 보이는 곳에 일군의 천사들의 무리가 하늘과 말구유를 덮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눈으로 봐도 너무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이곳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오신 곳임을 전하고 있다.

 

그 구유 안을 나귀가 소가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것은 이 작품이 단순한 예수 성탄의 설명이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우리와 같은 허약한 인성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사랑으로 접근하는 친밀한 하느님이심을 알리는 것이다.

 

즉 말구유에 탄생하신 이 아기가 바로 우리의 구세주이시라는 복음 선포를 하는 것이며 성서의 다음 구절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하늘아, 들어라 ! 땅아 , 귀를 기울여라! _주님게서 말씀하신다_ 내가 아들들을 기르고 키웠드니 그들은 도리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것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구나.‘(이사야 1;2-3)

 

성모님은 전체가 감청색인 옷을 입고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계신다. 방금 해산한 여인으로서의 피로감이나 다른 흩어진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 계신다.

 

성모님이 입고 계신 이 감청색은 신성의 상징이기에 항상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초상에는 인성의 상징인 붉은색과 이 색깔이 같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예는 성모님이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임을 표현하기 위해 감청 색깔만 사함으로서 비록 말구유에서 아들을 낳은 처지이지만 이 여인의 위상이 대단한 것임을 알리고 있다.

 

즉 초라하게 보이는 이 구유에 아들을 낳은 여인은 비참한 처지의 여인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뽑힘을 받은 고귀한 신분임을 알리고 있다.

 

그 다음 이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이다. 아기 예수는 붕대로 온 몸을 감싸고 있어 어떻게 보드라도 좀 촌스럽고 생경스러운 모습이다. 온 몸을 천으로 감은 모습이 예사스럽지 않다. 이것은 중세기 실재 있었던 모습이며 또한 탄생하신 예수님의 진정한 존재성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다.

 

의료적인 지식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기에 어린이가 태어나면 아직 너무 약해서 다치기 쉬운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해 온몸을 천으로 감싸는 풍습이 있었다.

 

작가는 바로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허악성을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막강한 권력이나 신통력으로 인간을 제압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허약함에 동참하심으로서 여느 인간들의 형제로 살기 위해 오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리스도 이해에 대단히 중요한 모습이다.

 

역사상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선 힘있고 막강한 존재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면서 중세기 교황권은 세상을 지배하는 왕권의 위에 군림하게되고 유럽 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어떤 것은 예수의 교회로서의 이미지 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많았다.

 

뭣보다 예수님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든 것은 교회는 힘있는 사람들의 집단이고 이 집단의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군림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지배 계급적인 종교를 만든 것은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남아 있으며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교회가 예수로 포장은 했지만 핵심으로 갈수록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관료 집단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이 작가가 표현했던 아기 예수에 대한 개념 망각에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제작했을 당시도 교회의 권력은 황제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으니 작가의 이런 표현은 대단히 혁명적이고 예언적으로 볼 수 있는데, 예술적인 과감한 표현으로 당시의 왜곡된 신학과 교회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에 쇄기를 걸었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이런 작가의 관점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데 너무 미약했기에 교회는 권력 집단으로서 양상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힘있는 모습으로 제시했다.

 

그 다음 성모님 뒤편에 있는 예수님의 아버지 성 요셉의 모습은 당시 또 오늘 까지도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 성모님의 동정성 교리에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어색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성모님의 감청색 옷과 달리 성 요셉은 붉은 빛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어색하게 성 오셉은 부부로서의 마리아와도 무관하고 예수 탄생과도 무관한 소위 교회가 말하는 양부라는 존재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색한 모습이다.

 

오늘 교회는 빨리 성모님의 동정성이 신체적 성적이 차원이 아닌 자기 인격 전체를 걸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결단임을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면에서 최근 교황님께서 동성간의 결합에도 사제가 축복할 수 있다는 허락하신 것은 성숙한 현대인에게 전할 수 있는 교회의 현명한 태도임을 생각하면 성모님의 동정성 역시 교회의 명쾌하고 시원한 해답을 기다리는 것이며 이 작가의 표현은 교회의 답답함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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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성탄 장면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바로 목동인데, 이목동의 개념은 오늘날과 전혀 다른 천민중 천민의 신분이 바로 목동들이었다.

 

   

짐승들에게 먹이가 되는 풀을 찾아 이동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의 처지는 당시 웬만한 젊은이는 외면하던 직업이었으며 오늘의 표현으로 모두 기피하는 3D 직종의 표본이었고 당연히 목동들의 존재는 일반인들로부터 천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는데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처음 드러내시므로 이들을 당신의 성탄을 알리는 첫 선교사로 사용하셨다.

 

이것은 크리스챤 삶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어떤 사회적 지위나 개인적 능력의 평가를 초월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은 평등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 작품 오른편에 천사는 목동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목동들은 예수님이 누워계신 말구유를 처음으로 경배하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성탄 소식을 전할 일군으로 목동들을 부르심으로 크리스챤이 지녀야 할 인간 존엄성을 바탕을 명백히 제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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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모님의 발치에 조산원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아기를 안고 아기를 목욕시키기 위해 수건을 든 여인이 있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위에 붕대처럼 감싸고 태어난 예수 아기의 성장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장 과정에서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허약성을 지닌 상태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초대 교회에서부터 사용된 전례 찬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오고 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립피 2: 6-8)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저울에 올려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쪽이 더 강조되고 있는지 알기는 좀 어려운 면이 있지만 신의 존재성은 위대하다는 고정관념에 의해 신성에 대한 강조가 오리혀 종교성을 확고히 할 수 있다는 착가에 빠지게 만들어 우리의 종교성이 예수님의 인격을 표현하지 못하고 공중누각 같은 신앙에 머물고 있지 않는지 반성할 일이다.

 

가톨릭 신자로서의 멋진 향기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선 예수의 인성에 더 접근해야 하고 이 작품은 우리에게 충격적일 만큼 예수님의 인격성이 우리와 같은 허약성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하던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an: 1823-1892)은 교회의 경직된 가르침에 실망하여 신학교를 나와 개인적으로 성셔를 공부한 후 그의 명저 예수의 생애를 집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그는 여기에서 17,18세기 프랑스 주교이자 역사가 였던 자크 보쉬에의 말을 빌려 예수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에 너무 경직되어있던 당시 교회는 이 표현이 무신론적 함축을 문제 삼았고, 결국 르낭의 교수 자격은 정지되었다. 그는 교회를 떠났으나 그가 쓴 예수의 생애는 교회가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완벽히 공유하신 분으로 가르치면서도 실재에 있어 신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로 예수님의 삶에 생기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현실에서 그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풍요로운 인간성을 지닌 예수를 만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가의 작품안에 드러나고 있는 허약한 어린 예수의 모습을 통해 가톨릭 신앙의 멋스러움을 세상에 전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얼마나 멋진 인간인가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약점에 동참하시는 예수님이야 말로 짧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멋진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전능 일변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분의 우리와 같은 허약한 인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모습을 거부함으로서 교회가 가르치는 하느님이 박제품의 양상을 띄게 되고 여기에서 생명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잉 교회를 떠나고 또 신앙을 찾으면서도 선 듯 교회에 들어오기를 어려워하는 현상이 교회의 동공화를 부채질하고 있는 현실에서 성탄 사건엣거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발견은 신앙의 생기 회복에 큰 힘이 될 수 있다.

 

상업화된 선물교환의 화려한 성탄이 오늘 성탄의 현주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기에 성당과 교회당 보다 백화점이나 유흥장에서 성탄의 생기를 더 느낄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서글픈 현실이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는 베틀레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어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해 붕대를 감고 조산원을 통해 숨쉬기에 도움을 받고 있는 아기 예수의 모습은 조용하면서도 따뜻한 인간적 정감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이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주님,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왔나이다.” (지혜서 18: 14-15)

 

성탄 팔부 마무리되는 토요일 성찬례 입당송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용한 성탄을 그리워하는 희원을 담은 내용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신자 중 절반 이상은 전혀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형식에 매여 살고 있다고 한다. 간혹 성탄 미사에 참석하거나 마음이 내낄 때 교회가 요청하는 자선 헌금을 던지는 수준에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들은 자기가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에 자기가 만든 인조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거나 아니면 아예 예수에 대한 개념에 전혀 관심이 없는 무개념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 작품은 오늘 신자들이 만나야 할 예수님의 정확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는 면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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