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가서 말씀은 연인이 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여인을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얘기이고,
그리고 태중의 두 아기 곧 주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연인 간의 만남과 같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기쁨과 설렘이라는 면에서는 두 만남에 공통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두 여인의 만남이 어떻게 연인들의 그 기쁨과 설렘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연인의 그것과 같다면 의미상으로 너무 가볍습니다.
사실 오늘 아가서의 표현들은 너무 간지럽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제 생각에 두 여인은 연인이 아니라 동지에 가깝고,
그러니 그 만남도 연인들처럼 사랑의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우선 연인처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공적인 만남이고
그러니 우연이나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저의 만남을 생각게 됩니다.
나의 만남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사적인 만남이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닌지.
공적이고 구원을 위한 만남은 얼마나 되는지.
만남 이전에 나라는 사람은 혹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닌지.
수도자가 되어 그저 자기 성취나 자기 복음화에 급급하고
그래서 세상의 복음화는 먼 나라 얘기인 것처럼 살지는 않는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더라도 혹 혼자 애쓰는 나는 아닌지.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세상의 복음화는 너무 거창하니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라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