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마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기도
by 고인현 도미니코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촉진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45-46)
거룩한 집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 바라십니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루어지기 바라십니다.
주님의 행동에서 그대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본보기를 보십시오 ... 그분은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 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거니와,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습니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환전상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주님의 돈은 곧 성경입니다.
-암브로시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의 영성에 영향을 준 신학들
3. 켈트 신비 전통과 동방 그리스도교:
프란치스코와 켈트 전통의 관계에 대한 암스트롱의 논지가 셜득력이 있는 만큼, 나는 액카르트가 켈트 전통과 더 분명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켈트인들이 엑카르트의 독일 곳곳을 자신들의 그리스도교로 물들였기 때문이고, 엑카르트가 시인이자 설교자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불시에 마감한 지역인 라인 강 유역에 폭넓게 정착했기 때문이다. 최초로 위-디오니시우스를 번역하여 서양에 소개한 사람은 810년경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켈트인 요한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였다.
죽은 지 3세기가 지난 다음에 행해진 이상한 재판에서 단죄받았지만,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엑카르트가 무시하지 않았던 유산, 곧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이루어진 서양 그리스도교 영성의 우위를 대신할 대안을 남겼다. 요한네스 스코투스를 전공한 학자 장 포터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라틴계 신학자들에 맞서 “그리스계 신학자들 면에 선다”라고 설명한다. 요한네스 스쿄투스는 창조 및 창조성에 대한 네 가지 이해를 기초로 하여 모든 실재를 구분했다.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창조성을 인간의 본질로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신의 현현으로 여긴다. 위-디오니시우스가
그랬듯이, 요한네스 역시 하느님을 일컬어 ‘무’라고 불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그랬듯이, 요한네스의 주의를 끈 것은 죄가 아니라 신화였다.(63)
아미나또레 평화기도 다락방 11월 3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히브 10-13장 / 야고 1-5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문화 주간>
생태 지향 :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암브로시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는 고대 교회에서 가장 고귀하고 품위 있는 인물가운데 한 분이다. 고대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333년에서 334년경 트리어의 황실에 속한 궁정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그의 아버지는 매우 높은 직책을 수행한 황실 소속의 공무원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여기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370년에 리구리엔과 에밀리엔 지방을 다스리는 집정관이 되었는데 밀라노가 이 지역의 으뜸 도시였다. 그는 이 지방의 집정관으로서 374년에 밀라노의 주교 선출에서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가톨릭 교도들과 아리안 교도들 사이의 불화를 종식시키고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주교를 선출하려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어린이가 “암브로시오 주교님!” 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군중들은 이 외침 소리를 받아들였고, 암브로시오는 강력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두 교파들의 공동 추대에 의해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세례를 받았고 8일이 지난 373년 12월 7일에 주교품을 받았다. 그가 행한 일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교회 정치와 관련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목적인 일이다. 그는 특히 휼륭한 강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황제의 고위 공무원 출신이었던 그는 영적인 능력과 일반 관리 능력을 잘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라치안 황제와 테오도시오 황제 시절, 당시 상류층에 여전허 강하게 남아 았던 이교도적 풍습을 거슬러 교회의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당시 원로원 회원들이 고대 로마의 이교적 풍습의 상징인 승리의 상을 원로원 회의실에 다시 세우려는 것을 강력히 저지했다. 아리아니즘에 깊이 빠져 있던
그라치안 황제가 교회를 다스리려 하자 그는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고 대응하면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라치안의 후계자인 테오도시오가 분노하여 사람을 7000명이나 처형하는 일을 저지르자 그는 황제로 하여금 교회에서 제시하는 보속을 공개적으로 수행할 것을 요청했다.(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