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얼마 가지 않아 파괴될 텐데
그것을 모르고 천하태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모름을 꼬집으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이 모름을 묵상하며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당신 아들을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아들이 술과 마약과 게임 중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한번 만나달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간신히 시간을 내어 방문했는데
그분의 아들은 언제 오라고 했냐며 저를 박대합니다.
그때 제가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런 그가 밉거나 그에게 화가 나지 않을 것이고
오늘 주님처럼 그를 보고서 애처로워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그 당시 평화의 길을 모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고,
평화의 길을 알려주려 오신 당신을 몰라보는 예루살렘이 애처롭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평화의 길을 모르고,
아직도 평화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이 주님임을 거부합니다.
공존하려고 하지 않고
공동선을 추구하지 않고,
형제를 적으로 만듭니다.
지금의 전쟁은 하마스가 미사일 공격을 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그들이 왜 공격했겠습니까? 공존하고자 했는데도 그랬겠습니까?
사실은 팔레스타인이 이미 오랫동안 살고 있던 곳에
이스라엘이 들어가 나라를 세우면서 분쟁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기에
정의로운 족속이라면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 미안해야 정상이며,
같이 사는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몰아내려 하고 박해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선민이라면 공동선을 추구하고, 하느님의 선을 나눴어야 했는데
잘못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기에 하느님의 선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유산을 형제들이 골고루 나눠 가져야 하는데
형이라는 자가 부모의 유산을 다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같지요.
이들의 이런 잘못된 의식은 예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슬기롭고 충성스러운 집사여야 하고,
도조를 잘 내는 소작인들이어야 하며,
미나를 잘 바치는 종들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나무라고,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될 거라고 예수께서 나무라자
오히려 ‘저자가 상속자다.’하며 하느님 아들마저 죽이려 하고 있지요.
이 예수가 또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 외에는 모두가 형제들이라고 하자,
다시 말해서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자나 힘없는 자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한 아버지의 형제들이라고 하자,
이들은 그런 예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죽이려 하고 있지요.
아무튼 그들은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제 생각에 그 무지는 선택적 무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고 싶지 않은 무지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하느님 아들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면 인정해야 하고,
인정하면 따라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들의 기득권을 다 내려놔야 하기에 모르는 채 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도 선택적 무지의 잘못을 많이 범합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채 살려는 무지 말입니다.
또한 모르고 살면 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선택된 무지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