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자칫 잘못 들으면
고생한 다음 갖게 되는 쉼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재산을 모으느라 고생한 다음
쉬면서 즐기려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들려서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움직여야만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부자는 노동의 대가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을 선택합니다.
재물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행동을 탐욕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재물이 주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우리는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욕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라면
나만 편안하고 나만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탐욕이 될 것입니다.
즉 부자의 어리석음은
나눔이 없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있는데
옆에 굶주린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자기가 먹던 것을 나누어 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눈을 감기도 합니다.
눈을 감고 맛있는 것을 즐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불편한데
이것은 편안함을 누리고 싶은 마음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불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한 행동이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옆 사람과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옆 사람이 기뻐할 때
더 기뻐하게 됩니다.
즉 함께 기뻐할 때
우리의 기쁨은 더 커집니다.
즉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라도 나눔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나눔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때문에
나눔을 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탐욕을 봅니다.
도움의 손길이 나에게만 와야 한다고
나만을 위한 것을 강요합니다.
그런 어려움에서도
나누는 기쁨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무한하게 줄 수 없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받은 것을 주는 것이기에
상대의 끊임없는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나눔의 기쁨에
우리가 가진 한계 안에 머무르는 연습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나눌 때
우리는 나눔의 기쁨에 온전히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