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제 주님의 십자가 현양 축일에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나눔을 했습니다만
오늘 주님의 어머니 통고 축일에는 긴 병에 성인 난다는 나눔을 하려고 합니다.
성인이라면 긴 병에도 환자를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거지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아들은 어머니가 오래 앓게 되면 엄마를 버려 불효자가 되지만
엄마는 아들이 아무리 오래 앓아도 그 아들을 버리지 않는데
이 면에서 성인과 어머니는 같습니다.
그런데 성인과 어머니의 공통점이 또 있습니다.
어머니나 성인 모두 내리사랑을 한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적인 내리사랑이라면
성인의 사랑은 성스러운 내리사랑이겠지요.
그런데 성스러운 내리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사랑을 내리받아서 하는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충만해져야지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과 성모님 사랑에는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들의 고통에 버리고 떠나지 않고 함께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인류 구원과 사랑에 함께한다는 면에서 성모의 사랑은 다릅니다.
보통의 엄마는 자기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면 함께하지만
자기 아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싫어하고
자기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신부 되는 것을 처음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고
나중에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게 되셨지만 그런 다음에도
북한 일과 같이 너무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의 경우는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들이 자신을 바치실 때
그것을 말리지 않으시고 다만 십자가 밑에서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아들을 성전에서 봉헌하실 때
가슴이 꿰 찔리는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는 얘기를 시므온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냐는
매정한 핀잔을 아들에게 들으셨을 때부터 이미 예견하고 각오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들이 죽은 다음에도 이어졌을 겁니다.
얼마 전 읽은 콜로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하지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남은 생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아들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모자란 부분이 혹 있다면 당신이 채우시겠다는 마음으로 여생을 사셨을 겁니다.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신 마리아는
아들의 구원도 함께하신 우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