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는 거라는 것을
마티아 사도만큼 더 잘 보여주는 사도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를”이 아니라 “너희를” 뽑으셨다고 오늘 주님 말씀하시니
마티아 사도뿐 아니라 사도들 모두를 주님이 뽑으신 것이지만
마티아 사도는 마치 로또에 당첨되듯 제비뽑기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위의 말씀을 묵상 주제로 뽑았습니다.
우리가 무엇 또는 누구를 선택하고 뽑는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를 놓고 그것을 선택하든지 포기하든지 하거나, 아니면
여럿을 놓고 그 중 이것을 선택하든지 저것을 하든지입니다.
한자어 선택과는 달리 뽑는다는 우리말은 그러나 여럿 중에서 뽑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뽑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을 뽑는다면
신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 어떤 신을 나의 주님으로 뽑는 게 되는데
이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우리 신앙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뽑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를 뽑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뽑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영광으로 받아들입니까, 재수 없이 귀찮은 일에 얽히는 거로 받아들입니까?
여기에 우리의 신앙과 주님 사랑의 정도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광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일 거고
귀찮은 일에 걸려들은 거로 받아들이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일 겁니다.
그제는 햇볕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여
찾아오신 손님들을 앞뜰로 모시고 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때 저희 수련형제 중 하나가 잔디에 수북이 난 토끼풀을 뽑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잠자기 전 오늘 복음말씀을 미리 묵상하다가
내가 너희를 뽑았다는 주님 말씀이 토끼풀 뽑기와 겹쳐졌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뽑으심은 세상에서 나를 뽑으심이라고 묵상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토끼풀처럼 세상에서 뽑힌 존재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섞여 살아서는 아니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뽑으심이 토끼풀 뽑기와 다르다면
토끼풀은 잔디를 위해 뽑아 버림을 당하는 것인데 반해
나는 하느님 백성을 위해 주님께서 뽑아 세우시는 거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고 하셨습니다.
가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당신 제자요 사도로 나를 뽑아 세우시는 겁니다.
세상에서 뽑아내어 당신의 제자요 사도로 세우신 다음
다시 세상으로 보내어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뽑히어 떠나온 세상으로 재 파견되어야 할 운명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들은 우리는,
그리고 이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는
또 하나의 마티아 사도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