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독서 민수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가 히브리어를 모르기에 원어의 뜻을 직접 해석할 수 없어
다른 번역들, 공동 번역과 개신교 성서와 영어 번역을 찾아봤는데 이러합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with their patience worn out by the journey,”
이 네 번역을 다 감안할 때 백성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무척 지치고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 마음 안에 조급함과 불만이 차올라
마침내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올 지경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며 바로 떠오른 말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큰 고통과 긴 고통이 떠올랐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나라고 잘 견딜 수 있을까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고,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견디고 이기는 사랑이 내게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제는 80이 넘으신 노부부의 병문안을 갔습니다.
남편이 치매에 매주 3번 신장 투석을 해오셨는데
이번에 자매님까지 폐암을 앓게 되신 분들이었지요.
그런데도 자매님께서는 남편을 요양 병원에 보내지 않고,
손수 돌보시는데 너무도 정성껏 그리고 깔끔하게 돌보시는 거였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걱정되어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많이 힘드시지요 하고 위로를 건네니 자매님께서
견딜 만하다고 너무도 훌륭하게 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견딜 만하다!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하시지 않고 견딜 만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항암치료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저와 같은 사람에게는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달리 그 큰 고통을 그분이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큰 고통보다 더 큰 사랑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저는 큰 고통과 더불어 긴 고통에 관해서도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 긴 고통을 견뎌낸 분들이 큰 고통을 견뎌낸 분들보다 위대합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애를 지닌 분이나 오래 고통을 겪은 분들을 볼 때마다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 긴 고통을 견뎌내심에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이분들 중에는 행복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고 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 앞에서 저는 제가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사실 행복은 사치이고 사랑을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이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더 나아가 힘이 되기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저 견디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고통에서 승리하시게 되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고통에서 승리하고 죽음의 고통까지 승리하여 부활에 이르게 하는 사랑,
이런 주님의 사랑을 일컬어 Passio 또는 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Passio의 사랑이 이분들의 긴 고통의 열매로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큰 고통과 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주님 Passio의 사랑이 함께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