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을 보면 나타나엘 두고 재미난 말들이 오갑니다.
필립보 사도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을 “와서 보라”고 하고,
주님께서도 당신에게 오는 나타나엘을 “보라”고 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그러니 우리도 이 축일을 지내며 주님의 초대대로 먼저 나타나엘을 보고,
또 나타나엘을 따라가 주님을 보는 ‘두 갈래 관상’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왜냐면 본래 관상이란 것이, 하느님 관상 한 갈래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관상을 제대로 했다면 우리 눈이 하느님의 눈이 되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나도 보고 이웃도 보고 자연도 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타나엘을 따라 주님 관상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오늘 나타나엘은 주님을 보러 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뜻 내켰던 것은 아니었지만
필립보를 믿었기 때문인지 권유를 받아들여 일단 가봅니다.
이것을 보면 나타나엘이 꽉 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답답한 사람을 일컬어 ‘꽉 막혔다’라고 하는데
필립보의 말을 듣고 마음의 문을 꽉 닫은 것이 아니라
필립보의 말을 믿고 마음의 문을 조금 연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주님을 직접 뵈니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고
주님을 완전히 믿게 됩니다.
이토록 믿음은 개방인데
필립보에 대한 작은 믿음이 물꼬가 되고 마중물이 되어,
주님께 대한 큰 믿음이 나타나엘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가 봐’, ‘일단 가 봐’라는 말이 중요하고, 이 말에 힘이 있습니다.
일 단계는 일단 가서 보는 것이고,
이 단계 곧 보고 나면 달라집니다.
말로만 듣고는 긴가민가했는데 확신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첫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셨고,
가서 본 안드레아와 오늘 필립보도 주님과 똑같은 말로
다른 제자들을 주님께 초대하고 인도합니다.
아무튼, 믿음이란 자기가 아는 것에 갇히지 않고
내 작은 지식으로는 모르는 더 큰 신비에 자신을 여는 것인데,
나타나엘은 이 신비에 열려 있었고, 그래서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뵙는 관상가입니다.
이런 나타나엘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당신처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처럼 보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진면목 또는 참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참모습을 못 보고 자기식대로 보는 것을 편견이라고 한다면
진면목, 참모습을 보는 것이 관상입니다.
사기꾼이라면 사기꾼이라는 진면목을 관상은 보는 것이고,
나타나엘처럼 거짓이 없으면 그 진면목을 보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관상쟁이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관상쟁이를 넘어 관상가가 되어야 합니다.
관상쟁이도 무당도 점쟁이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관상쟁이나 무당이나 점쟁이는 하늘과 하늘의 하느님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하늘이 열려 있는 것을
네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관상가는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인데 오늘 우리도
참 관상가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아 나타나엘처럼 관상가가 되어야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까지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관상가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