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하느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분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분이 없을 겁니다.
열심한 신자라면 더더욱 하느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은 용서하심으로 드러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한 신자라도 하느님은 용서도 하시지만
벌도 내리시는 분임을 믿지 않을 수 있고,
특히 벌은 하느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과 반대되는 거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탈출기의 주님은 용서하시는 분이 당신이시고,
벌을 내리시는 분도 당신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자비하시기에 벌을 내리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사람은
어찌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벌도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미움 때문에 벌 받았거나 내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서도 반대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정말 사랑하는 부모의 경우 사랑하기에 벌을 주지 않습니까?
참사랑의 부모는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면 자기 자식이 잘못될 것을 알기에
벌을 줘서라도 그것을 고치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죄와 잘못을 계속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고 망치는 것일 겁니다.
요즘 잘못된 자식 사랑 때문에 교사들이 학생을 벌하지 못하게 하고,
벌주는 것을 사랑이 아니라거나 편애라고 공격하여 문제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어른들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매를 대고 벌을 줘서라도 자기 자식을 잘 가르쳐달라고 선생님께 청했는데
요즘의 일부 부모들이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것은 대단히 미성숙함입니다.
그것이 다 자비와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물론 미움과 분노 때문에 체벌을 가하거나 편애해서는 안 되고
그런 면에서 학생 인권 조례도 필요하지만,
스승이 자기 자식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교육해주기를 원한다면
사랑과 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꾸고 스승의 사랑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탈출기의 가르침은
용서도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지만
벌도 하느님의 자비라고 가르치는데,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벌주시는 하느님에게서 더 큰 사랑과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