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마르타 축일이었던 것이 2021년부터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삼 남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왜 마르타의 축일이 삼 남매의 축일로 바뀌었는지
교황청 경신 성사성의 이유를 듣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북돋우고,
믿음이 믿음을 북돋우며,
성덕이 성덕을 북돋운 좋은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 남매는 서로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북돋우고 그래서
서로 성덕도 북돋워 서로 성인이 되게 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삼 남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서로 그러했고,
클라라의 자매들도 서로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불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불씨와 하나의 불꽃은 약한 바람에도 꺼지지만
작은 불씨와 불꽃이라도 여럿이 모이면 큰불이 되어
바람이 오히려 불꽃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커지게 한
또 다른 요소가 바로 라자로의 죽음입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을 통해서 큰 믿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는데
늦게 오심으로 인해 죽게 되었어도 마르타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고,
주님의 능력 곧 죽은 자기 오빠도 살릴 수 있는 주님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 것은 아무리 죽을병이라도 주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것과
주님의 청을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앎은 머리로 안 것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그가 한 경험으로 안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그동안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을 그라고 모를 리 없지요.
그러니까 알기에 의심치 않는 정도의 믿음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믿으라고 다그치십니다.
그치지 말라는 것이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까?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믿으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마르타는 주님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란 말이 있지요.
백 척이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 서서 한 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백천간두에 서 있는 것만도 위태로운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라니 죽으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야 진일보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거는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믿음이 한 걸음 올라선 마르타와 가족을 보고 본보기 삼는 우리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