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외국을 많이 나갔지만 다 일 때문에 나갔고,
그래서 저 혼자 여행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를 안내해주는 사람 없이 여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안내자 없이 여행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왜 했냐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에게 당신을 처음 드러내실 때도 저처럼 도움이 없으면 안 되기에
선구자요 증언자인 요한을 필요로 하셨던 것인지 얘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주님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의 필요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성인들도 마찬가지지요.
하느님께는 성인이 필요치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성인이 필요하지요.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왜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첫째는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겸손의 모범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세례자 요한 정도면
자기 분수를 모르고 충분히 나댈 수도 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은 자기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명성이 자자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기에게 몰려와도
그는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주님 앞에 있습니다.
물론 그도 사람들 앞에 있었지만
사람들 앞에 있지 않았다고 함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보이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하셨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주님 앞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늘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높이 생각해도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자기를 자리매김했지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맬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겸손에 관해 얘기하면서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지 그 이상이 아니”라고 한 말 대로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주님을 지속적으로 가리키는 자 곧 주님의 증언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겸손한 모범도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주님을 가리킴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을 따라가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을 가리키고 따르게 하는 그 역할이 더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자기에게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가게 하고
그럼으로써 주님을 따라가게 하고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한 세례자 요한은,
그랬기에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기에 합당하고, 우리에게는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례자 요한을 칭송만 하면 주님께서 나무라실 겁니다.
그를 바라보기만 하지 말고, 그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 따라가고,
그를 칭송만 하지 말고, 너희도 그처럼 되어라! 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