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남이 잘될 때 시기하는 사람은 있어도
남이 잘못되었을 때 위로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 위로치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위로치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위로할 수 없는 사람입니까?
자기도 위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아닙니다.
동병상련이라고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위로를 더 잘합니다.
서로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울어짐 없이 서로 위로합니다.
그러니까 위로를 할 수 없는 사람은 동병상련을 모르는 사람,
다시 말해서 아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너무도 부족함이나 어려움 없이 자라서 위로받을 일이 없었던 거지요.
배고픈 적이 없는 사람은 ‘배고프다는 것이 뭐야?’하고 의아해하겠지요?
그런데 반대로 위로가 정말 필요한 사람인데 위로받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생 위로는커녕 질책이나 꾸중만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위로도 꾸중도 다 차단하고 무통증 환자처럼 삽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무통증인 것이 아니라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통증이고
그래서 남을 위로할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위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지 못해 위로할 줄 모르는 것.
하느님은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신데 그 하느님 위로를 찾지 않고,
받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위로의 하느님인데 왜 하느님의 위로를 받지 못합니까?
조금 궤변 같지만 제 생각에 모든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일부 위로, 어떤 위로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애정 결핍증 환자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어떤 사람의 위로만 받고 싶고 그래서 그에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위로는 원치도 않고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하여 마다합니다.
왜냐면 위로받고 싶은 그 특별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해준 위로는 하느님의 위로가 아니라 그의 위로지요.
그리고 하느님은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통해서 위로하시는데
그 특별한 위로만을 원하니 다른 모든 위로는 위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시고,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듯 모든 선이시며,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모든 위로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슬퍼하는 사람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은 아니고,
그런 사람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틀림없이 하느님의 위로일 것입니다.
그러니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역으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
위로를 하느님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